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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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9.04.0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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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세상과의 소통

 

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며칠 전 고향 친구가 자살을 하였다. 죽기 하루 전, 다른 친구를 찾아와 하룻밤 같이 자자고 하더니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사업에 실패한 이야기며, 가정에 얽힌 이야기며, 그러더니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 모여 앉은 많은 친구들이 안타까움을 토하며, 울분을 토하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일그러져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걱정 반 분통 반 털어놓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분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십대 후반으로 들어선 친구들의 모습에서 불안한 미래가 보이고, 그들의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대로 취업이 되지 않아 암담하다는 넋두리 앞에서 또 한 번의 절망을 보았다. 


The Reader -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삼십대의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나치가 지배하던 독일에서 친위대에 자진 입대하여 유대인 감시원이라는 직책을 수행한다. 그녀가 친위대에서 했던 일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유대인을 감시하는 일이다. 그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매주 열 명의 유대인을 선정하여 아우슈비츠 사형장으로 보내는 일이다. 그녀는 무감각적으로 주어진 그 일을 성실하게 행한다. 그녀에게는 사형을 멈추게 할,  열 명을 선택하는 일을 멈추게 할 권한도 힘도 없다. 그녀는 맡겨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 단지 그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쳇바퀴처럼 돌았을 뿐이다. 패전이 가까워진 시점, 유대인 호송작업에 동원되어 역시 감시원 일을 하던 그녀, 호송 도중 밤이 되어 잠을 자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교회에 가두고 문을 잠근다. 그런데 연합군의 폭격이 시작되었고, 교회는 불탄다. 물론 그 안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도 모두 타죽는다. 그렇지만 감시원인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녀에게는 문 열어 줄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다. 그녀는 두려움 속에 외롭게 숨어 지내며 전철 차장으로 근무한다. 그녀 앞에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 나타난다. 성적 호기심이 극에 달해 있던 열다섯 살짜리 소년, 나치에 협력했던 것 때문에 전범으로 체포되어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숨어 지내야만 했던 고독한 삼십대의 한 여인, 두 사람은 매일 반복하여 몸으로 나누는 사랑에 빠져든다. 몸으로 나누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 관객이 어느 쪽으로 느낄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다. 몸으로 사랑을 나눈 후, 또는 나누기 전 그녀는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자기가 읽는 것보다 읽어주는 것이 더 좋다면서. 소년은 자랑스럽게 호머의 “오디세이”를 읽어주고,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읽어준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전철 차장에서 내근으로 승진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녀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8년 후 법대생이 되어 법정에 실습나간 장성한 소년 앞에 그녀는 전범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다른 공범자들은 모두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지만, 그녀는 사실대로 말한다. 감시원이었던 자신은 감시원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왜 교회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재판장을 향해, 오히려 재판장이 자신이었다면 그 때 어떻게 했을 것 같느냐고 되묻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재판장, 하지만 그에게는 그녀를 단죄할 권한이 있다. 글을 알지 못하는 그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는 공범들의 거짓진실을 부인하지만, 필적 감정을 해야겠다는 재판장의 지시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자신이 보고서를 썼다고 자백한다. 자신이 글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수치심보다는 무기징역형을 택한 것이다.


그녀가 글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 보고서를 썼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소년은 진실을 알려야 하는지, 아니면 그녀가 수치심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며 교도소로 향하도록 바라만 보아야 하는지 갈등하다가 후자를 택한다. 어쩌면 자신의 철부지 시절의 잘못이 들통 나는 것이 두려워 차마 나서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소년은 끝까지 그녀의 문맹을 비밀로 덮어준다. 교도소에 있는 그녀에게 변호사가 된 그 소년은 재미있는 소설들을 카세트에 녹음하여 보내기 시작한다. 꼬마라고 불렀던 소년이 녹음을 해서 보내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소년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한다. 소통을 원한 것이다. 하지만 글을 모르니 어쩌랴, 그녀는 그 소년에게 편지를 쓰기 위한 목적으로 테이프를 들으며 소설 속의 활자를 따라간다. 독학으로 글을 깨우친 그녀, 마침내 소년에게 편지를 쓴다. “꼬마야, 지난번에 읽어준 책은 정말 훌륭했어”라는 짧은 편지이다.


20년을 복역하고, 가석방을 앞둔 그녀를 교도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그 소년, 역시 중년을 향해 가고 있다. 거처할 곳과 직장을 구해놓았으니 나오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지만, 나와서 만날 수 없다는 말도 함께 남긴다. 그리고 가석방일, 그녀를 마중 가지만, 그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출소하여 소통의 부재를 겪느니 차라리 교도소 내에서 테이프를 들으며 소년과 소통하며 소년이 읽어준 책을 감상하는 것이 더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케이트 윈슬렛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타이타닉에서 열연을 했던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완숙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랄프 파인즈가 성인이 된 소년 역을 맡았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강한 연기를 펼쳐 보였던 랄프 파인즈의 연기 또한 깊이가 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법대교수이자 판사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이다. 이 소설이 10년전 오프라 윈프리쇼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과연 열다섯살짜리 소년과 삼십대 중반의 여인과의 육체적 사랑이 적절한가 라는 문제로 사회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이나 영화의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던지는 우문이다.

 
이 소설이나 영화가 묻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시대와 역사 앞에서 한 인간은 작은 부속품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미약할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차라리 감옥행을 택할지언정 글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하는 자존심도 또한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체가 갇힌 감옥생활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무심함은 참고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 있지 않았던 재판장의 질책처럼, 누구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지적하고 호통칠 수 있지만, 총부리가 겨누어진 현장에서 누가 과연 “정의와 진실”만을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녀의 감시를 받던 중 살아남은 한 여자는 끝까지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그 수용소에서 무엇을 배웠는가고 묻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학교를 가야지 수용소로 갈 것은 아니라며 그 피해자 역시 세상을 향해 되묻는다.


지금도 가해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 그릇의 밥을 먹기 위하여, 한순간 잠을 편히 자기 위하여, 세상은 지금도 전쟁 중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엉키고 설켜 있다. 그러면서도 금방 누가 등 뒤에서 낚아채기라도 할 것 같은지 바삐 바삐 앞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아니 쫓기고 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내 친구나 영화 속의 여인 한나처럼 생활고에, 아니면 외로움이나 남모르는 고민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넘쳐나고 있는 세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일 년에 만오천 명이 넘게 자살하는 세상은 진짜 문제가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든, 국가대표축구팀이 북한을 이겨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든, 그것은 순간의 위로일 뿐이다. 모두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보장되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세상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묵묵히 오늘도 신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모든 생명을 살아가게 하소서,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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