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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9.03.0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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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인간의 추악함

 

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옛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이다. 눈으로 한 번 보고 확인하는 것이 남의 말을 백 번 듣는 것보다 효과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경험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소리가 갖는 힘은 보는 것보다 더 대단할 때가 많다. 소리와 관련하여 컴퓨터 게임중독 증상을 보인 아이들에게 약속을 게임을 무제한으로 해도 좋지만 소리를 없앤 상태에서만 허락하겠다는 조건으로 실험을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게임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음향효과가 얼마나 인간을 뇌세시키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사이버마약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이버마약이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뇌파를 자극하여 마약중독증세에 빠지게 한다는 음원, I-Doser를 말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인터넷 음원에 중독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리에 대단히 민감하다. 계속하여 북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운동경기나 사람을 흥분상태로 몰고 가야 하는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음향 조작자들이 북소리를 크게 틀어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절로 그 소리에 자극을 받아 흥분하게 되고, 집단군중심리에 쉽게 빨려들어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 사물놀이하는 분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특히 꽹과리 소리를 오래 듣다보면 우리의 심령이 황폐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놋쇠 등으로 만들어진 꽹과리의 고막을 찢는 듯한 파열음은 오래 듣다보면 우리의 뇌의 고요를 깨뜨리게 되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리는 그만큼 우리에게 민감하고 자극적이다. 그래서 도를 깨닫기 갈망하는 많은 선인들은 심산 깊은 계곡에서 고요와 벗하였는지도 모른다. 현대사회는 소리가 넘쳐나고 있다. 우리는 각종 건설공사장의 굉음에서부터 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 지하철운행소리, 자동차소음에 이어 거의 모든 집에서 틀어놓은 티브이나 라디오 소리, 심지어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그 소리의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소리의 크기 단위인 데시벨의 수치가 높아져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이어폰을 꽂고 생활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그들의 청력이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 노인이 되어서 귀가 먹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층의 청력 약화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는 자신의 청력 수준만큼 높아지게 되어 있다. 자기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상대방도 들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목소리의 톤을 높이게 되고, 한 사람이 높이면 덩달아 다른 사람도 높여야만 자기의 소리를 전달할 수 있게 되어, 세상은 와글와글, 마치 개구리들이 집단으로 울어대는 것 같은 소음상태를 유발하게 된다.


요즘 이충렬 감독이 제작한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관객 210만 명을 돌파한 채 고속질주 중이다. 워낭소리란 말이나 소의 목에 매달은 워낭이라는 작은 놋쇠 종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 마치 절의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에서 나는 풍경소리처럼 말이나 소가 터벅터벅 걸을 때마다 그 목에 매단 작은 종에서 딸랑딸랑 나는 소리이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영화관을 찾아 관람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독립영화의 일반적 특색이기도 하지만 그 영화의 내용은 참으로 평범하다. 팔순 노인이 나이 마흔이 넘은 황소와 삼십 년 넘게 살아온 이야기 중 황소가 죽기 직전 마지막 1년의 생활을 담담히 화폭에 담은 내용이다. 시골 노인 부부의 평범한 일상이 아름다운 화폭에 담겨져 있다. 영화 속의 소는 평생 짐을 지고 살아왔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소는 충직했고,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노인 부부가 아홉 자식을 기르고 가르친 것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30년 함께 살았다면 노인 부부가 오십이 넘어 그 소와 살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노인 부부의 자식은 대부분 성장한 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 소는 워낭소리를 내며 삼십 년 넘게 그 중년의 부부와 함께 늙어가면서 그 노인이 될 때까지 노동력을 제공했을 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실제의 워낭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소의 워낭소리를 참 많이 들었었다. 밤눈 어두운 말이 워낭소리 따라 백리길을 간다는 옛말이 있다.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소나 말이 제 목에 매단 작은 종에서 나는 워낭소리를 길동무 삼아 끝없이 걸어간다는 것이다. 이 속담은 제 스스로 소리를 내면서 외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의 고달픔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이 그 영화를 보고 소박한 노인네들의 삶과 충직한 소와의 마지막까지의 우정(?),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감동을 받았다는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눈물을 흘렸다는 관객의 평이 있는가 하면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졌다는 평도 있다. 물론 더러는 악평을 가하며 돈 주고 영화관에서 보기에는 아깝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가 아닌 노인 부부의 입장에서 소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노인의 입장에서야 평생 자신의 농사짓는 것을 거들어 온 충직한 소가 얼마나 고맙고 기특하겠는가.


나는 문득 워낭소리에서 노인 부부가 아닌 소가 되어 본다. 만일 워낭소리 속의 그 소가 힌두신앙을 갖는 인도에 태어났더라면 일생이 얼마나 편안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노인 부부 집으로 팔려온 후 삼십 년 넘게 노인 부부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여 온 소는 얼마나 힘든 생을 살았을까? 한 시도 코뚜레를 풀지 못한 채 끌려 다니면서 힘들게 짐을 져 나르고 논밭을 갈기 위해 쟁기질을 해야 했던 그 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린 시절 어른들은 송아지가 조금 자라면 영낙없이 코뚜레를 소의 코에 꿰었다. 요즘 식용이 목적인 비육우들은 코뚜레를 꿰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낭소리 속의 소처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소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억지로 코뚜레를 꿰었다. 그 뒤로부터 소는 꼼짝없이 주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 속에 채워진 코뚜레가 끌리면서 코에 엄청난 통증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코뚜레는 소에게는 가장 잔인한 형벌도구이고, 워낭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자명고이다. 평생 동안 하루도 쉼이 없이, 워낭과 코뚜레의 지배를 받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최씨 노인으로부터 “좋은 데로 가거래이”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워낭과 코뚜레가 풀리는 소는 비로소 얽매임에서 풀려나게 된다.


소는 코뿌레와 워낭이 풀리는 순간 숨을 거둔다. 그리고 구덩이가 파이고 소의 사체 위에 흙이 뿌려진다. 그 영화를 보았다는 동료 시인은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그 영화는 평화로움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정한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고. 삼십년 넘게 자신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 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커녕 그 소를 어떻게든 팔아서 한 푼의 돈을 챙기겠다며 마지막까지 가격 흥정을 하고 있는 인간 심성의 추악함을 보았다고, 워낙 싸게 부르는 바람에 그때야 비로소 그 돈을 받고서는 못 팔겠다며 팔기를 거절한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냐고, 그 소장수가 몇 푼만 더 준다고 했다면 그 소를 인정없이 그대로 팔았을 것 아니냐고. 그리고 마지막에 심장에 꽂힐 말 한마디를 한다. 그 소를 묻어줄 때 자기였다면 최소한 그 소의 죽음 앞에 양초 한 자루는 켜 소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고, 그 소의 사체 위에 적어도 한 장의 신문지라도 덮어줬을 것이라고. 그게 삼십 년 동안 자기를 위해 헌신해 온 한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예의가 아니겠는가고 말이다.


평화로운 모습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잔인함을 보았다는 동료 시인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신이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워낭소리 속의 소처럼 인생의 코뚜레를 꿰인 채 평생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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