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신발, 그 우아한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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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신발, 그 우아한 상징
  • 법률저널
  • 승인 2008.12.1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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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신발은 팬티와 함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헐벗고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촬영된 동영상에는 어김없이 신발 벗은 아이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신발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까닭에 신발은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최소한의 욕망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발은 발톱을 감추지 못하는 인간이 땅위에 서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이다. 발톱을 감추는 동물에게는 신발이 필요 없다. 그들의 단단한 발바닥이 신발을 대신하고, 감추어진 발톱이 땅을 박차고 뜀박질할 수 있도록 한다.


지난 17일 오후 세 시 40분쯤 전주시 덕진동 전주동물원에서 사자와 호랑이의 격투가 벌어져, 암호랑이가 숫사자에게 물려 죽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숫사자가 사육사가 던지는 생닭을 나꿔채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깊이 5미터의 함정에 떨어졌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암호랑이가 자기 영역 침범을 용서할 수 없다며 자진해서 함정에 뛰어들어, 동물의 왕인 사자와 호랑이가 물고 물리는 격투를 한 끝에 몸무게가 100킬로그램 정도인 시베리아 암호랑이가 110킬로그램 정도인 숫사자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생닭 한 마리가 발단이 된 두 맹수의 승부는 숫사자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육사의 말에 의하면 사자와 호랑이의 승부는 싸움 당시 기선 제압 조건과 공격성에 의해 좌우되며 어느 한쪽이 절대 우세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만일 두 마리 맹수가 동물원 함정이 아닌 초원에서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서 함정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물원이 만들어놓은 그 함정은 사자와 호랑이의 경계였다. 서로가 경계를 지키고 있는 동안 서로의 영역은 안전했고, 게으르고 무료하였을지언정 생명을 지키고 살아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끼 먹이로 제공된 생닭 한 마리를 쫓다가 함정으로 추락한 숫사자, 얼마나 화가 나 있었으랴? 그런데 그것을 옆집, 안전지대에서 바라보고 있던 호랑이가 제 영역을 침범해 왔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제 죽을 줄 모르고 숫사자를 물어뜯겠다고 자진해서 함정으로 뛰어내렸고, 그 결과는 힘의 역부족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발, 유리구두는 모든 세계인에게 동경이다. 어린 시절 신데렐라 동화를 읽지 않은 어린이가 없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신데렐라의 한 컬레 유리구두 마법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신데렐라를 접한 어린이는 어느 날 갑자기 왕자의 품에 안기는 신데렐라리즘에 사로잡혔을 것이고, 신데렐라를 읽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당장 자신의 발에 신켜 질 한 컬레 운동화를 꿈꾸며 가난을 곱씹을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도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쯤, 가난한 어린이들이 맨발일 수밖에 없는 현실만큼이나 신발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들 검정고무신으로 상징되는 새까만 고무신을 신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리 오래 신어도 닳아지지 않았던 검정고무신, 결국은 발이 자라 신발의 사이즈가 맞지 않을 때쯤 새 검정고무신을 부모님께서 사 줘 신어야 했던 많은 또래 아이들은 그 신발이 지겨워 어찌할 줄 몰랐었다. 학교운동장에서 체육시간에 축구라도 하는 날이면 공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검정고무신을 쫓아 부끄럽지만 열심히 뛰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게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로 기억된다. 어머니께 조르고 졸라 운동화 한 컬레를 선물 받고, 내 평생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던 날, 나는 그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뛰고 또 뛰면서 빨리 체육시간이 들어 있는 금요일이 오기를 애오라지 기다렸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운동화는 석 달이 채 가지 않아 낡아 떨어졌고, 또다시 검정고무신을 신어야 했었다. 그러기에 어렵게 구해 읽었던 신데렐라 동화 속 유리구두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환상의 나래를 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디 한 번 상상해 보자. 유리구두를 신고 과연 몇 발자국이나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몇 걸음 걷지 않아 발뒤축이 아프기 시작할 것이고, 발등이 까져 피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유리구두에 금이라도 가는 날, 아니 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의 두 발은 유리파편에 찢기고 피범벅이 되고 말 것이다. 유리구두는 백마 탄 왕자가 손에 들고 신데렐라를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딱딱한 신발구조 때문에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우리의 소중한 두 발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흉기가 될 것이다. 그게 냉정한 현실이다.


임기말을 앞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이라크를 방문했고, 미군을 격려한 뒤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이라크인 기자 문타다르 알-자이디가 부시 대통령을 향해 던진 신발 이야기가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 두 번에 걸쳐 신발을 하나씩 집어던지며 그는 부시를 향해 “개”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부시는 이를 잽싸게 피한 뒤 "난 모욕당하지 않았고, 미국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언론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회자되자 이 말이야말로 부시다운 발언이라며 더 큰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반미선봉에 서 있는 베네수엘라의 우고차베스 대통령이 박장대소하며 “용기 있는 일이다. 나도 용기가 없어 신발 던지는 것은 못했는데 기자의 이런 행위는 정말 용감한 행위”라고 말했다는 외신이 전해져 온다.


신발, 군대생활 할 때 소위 쪼인트 까인다라는 속어처럼 군화로 앞정강이를 수없이 채였던 기억이 있고, 그때 입은 상처로 인해 내 앞정강이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흉터가 남아 있다. 축구화를 신고 축구공을 차는 박지성의 발길질은 아름답다. 그렇지만 신발을 벗어 집어던지고, 이를 잽싸게 피하는 세계최대강대국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볼 성 사납다 못해 목불인견이다. 뿐만 아니라 체면 구기지 않았다고 강변하고자 “난 모욕당하지 않았다”라고 거짓 너스레를 떠는 것은 가관 중의 가관이다. 페일런 미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러시아의 대미외교정책에 대한 질문에 자기 고향 알라스카에서는 러시아가 보인다라고 대답하며 자기의 외교적 식견이 있음을 토로했던 황당한 말이 미국인이 뽑은 2008년 최고의 유행어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 다시 최고 유행어를 뽑는다면 아마도 부시의 저 말이 1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신발세례를 받고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바보 아닌가? 아무리 계면쩍고 무안하였더라도 그 자리에서 화를 내야하고 분노를 표출해야만, 앞서의 이라크 전쟁을 선포했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신발은 가는 곳을 가리지 않는다. 화장실에도 들락거리고, 쓰레기장도 들락거린다. 물론 아름다운 장소도 수없이 찾아가지만, 근본적으로 신발은 고마운 이기임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것이다. 인간이 소지하고 있는 가장 더러운 물건으로 두 번이나 얼굴에 공격을 당하고서도 모욕을 느끼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알 자이디의 행동은 무모했다. 하지만, 그의 이라크인으로서의 분노 표출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약 용기 있는 이라크인, 진정한 이라크인으로 아랍권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에게 국가원수모독죄로 6년형까지 선고될 수 있으니, 그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랍권에서 그의 행동을 쾌거로 받아들이고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니, 그럴 법도 하다 싶다.


앞으로 대통령 경호원들의 업무가 더 무거워질 것이다. 대통령이 가는 곳에 폭탄이 장치되어 있는지 등을 조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 가까이 가는 사람들의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해달아야 할 판이니 말이다.


우리 옛말에 오이밭에 가서는 신발끈을 고쳐 매지 말고, 배나무 아래에서는 갓끈을 고쳐매지 말라고 했다. 혹시 오이를 따는지, 배를 따는지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아예 하지 말라는 선인들의 경고이다.


오늘도 외출하기 위해 신발을 신을 것이다. 어렸을 때보다 너무 좋아진, 그래서 발바닥도 편하고, 어디를 걸어도 불편함이 없는 내 발에 친해진 신발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내 발을 보호해주고,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 주는 내 신발에 대해 잊고 있었던 감사함을 가르쳐준 알 자이디 기자의 무모한 행동을 떠올리며, 나도 누군가로부터 신발투척세례를 받은 일을 한 적은 없는지, 다가오는 연말을 앞두고 반추해봐야겠다.


세계 모든 어린 아이들이 신발을 신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겠다. 세계 모든 어린 아이들이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환상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겠다. 검정고무신을 사주셨던, 아니 내 평생 몇 안 되는 최고의 기쁨 중의 하나로 기억되는 운동화를 최초로 사 주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감사해야겠다.


신발아,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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