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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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한다는 것
  • 법률저널
  • 승인 2008.10.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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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숙자 시인의 잉크-10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들 머릿속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생각이 난데없이 움트고 자라며 종횡무진 시간을 장악할 때가 있다. 느닷없는 센티멘탈리즘․니힐리즘․멜랑꼴 리가 범람하는가 하면 까닭도 없는 환희․황홀․행복․충만감이 도래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나를 선택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로 끌고 다니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문득 ‘주홍날개꽃매미’라는 말이 내 의식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주홍날개꽃매미’가 이 수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1분전만 하더라도, 아니 1초전만 하더라도 ‘주홍날개꽃매미’는 이 원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이 순간에도 ‘주홍날개꽃매미’가 왜 내 의식을 침범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생각’이라는 폭군 앞에 내 지각 영역이 무방비상태로 열려 있음을 감지했을 뿐이다. 성현들은 마음을 ‘비워라’ 권유했지만-권유하지만 비우려는 생각 역시 자아평온을 위한 방법론일 뿐 텅!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생각을 비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야흐로 사유하기에 알맞은 시월, 그리고 요즘은 중순! 냉난방의 인공적 조절 없이도 하루하루가 활발스럽다. 쓰기에도 읽기에도 알맞은 기온이 연이어진다. 이런 때를 일러 선비의 나라인 우리 국민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명명해왔다. 아무튼 읽거나 쓰거나 그 본령은 ‘사유’일 것이다. 타인의 사유를 체험하는 일, 또는 자신의 체험을 사유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읽기와 쓰기의 차이이지만 사유를 접한다는 점에서는 읽든 쓰든 그 어느 쪽도 다르지 않다.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나 군자라 해도 남의 사유를 읽지 않으면 자신의 사유를 넘어설 수 없고, 짝 없이 고명한 사상가일지라도 자신의 사유가 타인의 사유에 공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세상을 두루 비출 수 없다. 그러므로 사유는 깊고 넓고 부드럽고 발라야 한다. 옛날 옛적 중국의 어느 문인이 “이 정도쯤이야.”라고 공자를 깔보며 비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집필에 들어가 책을 엮었다. 그러나 그 서책은 오래지 않아 아낙네들이 젓갈 항아리의 아가리를 싸매는데 뜯어 썼다고 한다. 하여 철리(哲理)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였으니….
 
  시골 아이에게 열 살이란 무슨 의미일까. 나의 그 시절은 부지런한 부모님 덕택에 배고프지 않았지만 땀방울의 고달픔을 가슴에 새길 정도의 생각은 있었다. 정확히 열 살 때, 나는 꽤 여러 가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사유가 발아하지 않았나 싶다. 그 무렵 나는  ‘미심’과 친했다. 또래가 대여섯 명이나 되었지만 특히 미심을 좋아했던 까닭은 마음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 나이에도  ‘인간성’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우린 서로 믿고 어깨동무했을 것이다. 그해 모내기철 어느 하루, 미심과 나는 들을 가로지르는 도랑에서 우렁이를 잡으며 놀았다. 그런데 문득 도랑둑에 버려진 못단들이 눈에 띄었다.
이 논 저 논에서 심고 남은 모 타래는 으레 그렇게 내던져지기 마련이었다. 논배미의 모들이 푸르게 자랄 동안 그 못단들은 누렇게 뜨거나 마르다가 잡초에 묻혀 썩어 없어지고 만다. 나는 미심에게 말했다. “저 못단들을 가져다가 이 도랑 가에 심자. 너는 그 쪽에, 나는 이쪽에!” 우린 즉시 우렁이를 놔주고 모 뿌리가 물에 뜨지 않도록 꼭 꼭 심어나갔다. 
 
  두 줄로 석 줄로 들쑥날쑥 심은 모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파래졌다. 아버지가 정성껏 돌보는 논 속의 벼 포기보다도 허리가 실했다. 도랑에는 거름도 약도 칠 리 없건만 얼마나 야무지게 폼을 잡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들까지 뿌듯해했다. 어른도 미처 못한 생각을 애들이 실천에 옮겼다는 것과, 그냥 걸어도 한참 길이나 되는 철둑 밑까지 심었다는 데 대해 우리 아버지 역시 여간 신통해 하시는 게 아니었다. “어린 것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보냐?”고 말이다.
누대를 걸쳐 도랑이란 그저 농수를 대는 물길이었을 뿐, 모심을 만한 틈새가 발견되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열 살짜리는 별 뜻 없이 못단을 주워 심었을 따름이지만 아버지는 수확량을 어림잡아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둑까지는 족히 2킬로미터를 넘었으니 말이다. 미심과 나는 짙푸른 ‘우리의 벼’와 함께 여름내 즐거웠다. 도랑의 벼들은 가뭄타지 않았고, 비온 뒤 물이 불어도 끄떡없이 제자리를 사수했다. 화분의 난초 잎이 아름답다한들 들판 가득 산들바람 밀어 보내는 벼 잎에 비하랴.
 
  드디어 온 들판이 꾀꼬리색을 드러냈다. ‘우리의 벼’ 이삭도 또록또록 여물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그 벼를 적기에 베기 위해 신중을 기했다. 베자마자 비가 내려도, 베기 전에 날이 궂어도 안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단 벤 벼는 단으로 묶어세우거나 들판에 깔아 어느 정도 말린 다음 이삭을 훑는 법이고, 설령 베지 않았더라도 추적추적 비를 맞히면 대부분의 낟알에서 싹이 돋아나버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벼’를 당신의 문전옥답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쌀이 얼마나 나올지 따로 타작을 해봐야겠다.”고도 하셨다.
그런 아버지 앞에 나는 왠지 겸연쩍었다. 어쨌든 날이 잡혀 매끼와 낫을 든 아버지가 도랑으로 향했다. 나도 폴짝폴짝 뒤를 따랐다. 황금빛 논 두둑에는 메뚜기며 잠자리며 드높이 떠가는 새털구름이며, 들판 가득 당초무늬 풀고 가는 바람결이며….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만추였다. 그러나 도랑에 당도한 아버지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의 벼’는 온데간데없고 말 한마디 못하는 들국화만이 웅기중기 둑 기슭에  끔벅이고 있었으매.
 
  아버지와 어머니는 미심의 부모에게 혐의를 두었다. 한쪽씩 심었으니 한쪽씩 베자는 미심과 나의 합의가 있었고, 우리는 그날 벨 거라고 알려뒀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양쪽 벼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미심의 부모는 어느 해 봄 우리 어머니한테 빚 내어간 쌀 한 가마니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못 준다”고 홉뜨며 뚝 떼어먹은 전과도 있는 터수였다. “목 뻣뻣이 쳐들고 막무가내 못준다고 대들더라고~.” 미심어머니를 한탄하던 우리 어머니.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잠자던 시절, 새벽녘 이불 속에서 나누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곤 했던 그 시절. 미심어머니의 해악은 동네에서도 이미 정평이 났다는 걸 나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미심만큼은 착했다. 내 입에서 벼가 사라져버린 이야기가 나올 때에도 무반응이었다. ‘누가 그랬을까’, ‘아깝다’ 등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미심쩍은 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미심의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 예전이나 다름없이 어울렸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염려했지만 ‘어른은 어른, 우리는 우리’라고 눈치 보면서, 꿈을 꾸면서.
 
  미심은 나와 동갑이니 나만큼 주름잡혔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길이 나뉘어 만나지 못한 세월이 수십 년이나 되었다. 고향의 들판은 경지정리가 되어 그때 그 도랑물이 아니고, 우리 또한 먼 길을 돌았으므로 지하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대도 몰라보지 않을까. 어디서 어떤 삶을 누리든 진정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빈다. 오래 전, 미심어머니는 무고한 사람을 고소하여 이겼다는 소문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돈을 좀 벌었다던가! 그래서 남녀노소불문곡직 쩍하면 법대로 하자고 핏대를 세웠다던가! 그래서 결국 칠령팔락 마을을 등지고 떠났다던가!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지도….) 어쩌다 날아드는 미심어머니 소식은 늘 그렇게 부정적인 내용이었지만, 여섯이나 되는 미심의 형제들은 단 한 명도 나쁜 소문에 휩싸이지 않았다. 시간이 주는 거리는 지리적 여건의 거리보다도 훨씬 더 멀 수가 있다. 미심과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뜰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이다. 미심도 나와 함께 첨벙거렸던 도랑물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을까? 가끔은 그때를 그리워할까?
 
  생각이란 의지 밖에서 불어오지만 일말의 실마리도 없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보고 듣고 경험했던 일들이 희석․마모 재조립되면서 의식세계를 드나드는 현상이다. 잠재의식 속에는 우리가 겪은 별의별 편린들이 다 저장되어 있다. ‘주홍날개꽃매미’만 하더라도 위협적인 존재로 뇌리 깊숙이 각인되었기 때문에 떠올랐던 것이다. 황사에 묻어온 ‘주홍날개꽃매미’는 겉보기에도 토종 참매미나 쓰르라미와는 확연히 다르다.
나무의 수액을 빨아먹으며 살충제로는 잘 죽지도 않고, 소리 내어 울지도 않는, 집단으로 몰려다니므로 보는 대로 밟아 죽여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어찌 그럴 수야 있으리. 올 여름엔 우리 동네 나무에도 붙어 있었으나 아으~, 각설하고. 사유는 상처로부터 깊어진다. 고통과 고난은 사유의 입구이며, 사유는 분별력의 기초단위다. 열 살 때 도둑맞은 벼이삭도 내 사유의 첫걸음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벼에 대한 보상으로 신은 나를 여태 굶지 않게끔, 평생 꿈꾸는 자가 되게끔 살펴주셨을 것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며 감사하고 감사하니 모든 것이 감사하다.
 
 정숙자 시인은 1952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다. 1992년 동국대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으며, 1997년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들소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등이 있다.
정숙자 시인의 잉크는 매월 셋째주에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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