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나 배구, 핸드볼 등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축구경기를 관람하다보면 “반박자만 빨랐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격수는 이리저리 사방팔방으로 야생마처럼 헤집고 뛰어다닌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할 때 적소(適所)에 있어야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제때에 슈팅(shooting)을 날려야 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슈팅하는 모습을 보면 잘하는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의 차이가 꼭 반박자이다.
순간을 놓치면 공을 빼앗기거나 슈팅을 해도 벌써 상대팀의 방어에 걸리게 되어 있다. 정말 찰나인 반박자의 차이로 인하여 상대의 빈틈을 정확히 찌르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반박자라는 것이 아주 작은 차이로 보이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엄청나다. 이렇게 중요한 ‘남보다 반박자 빠른 슈팅’을 하기 위해서는 연습만이 유일한 길이다. 반복된 연습에 의하여 동물적 반사신경에 의하여 슈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운동경기에서 반박자로 인하여 득점에 실패하는 모습을 볼 적마다 나는 부끄러운 과거가 되새겨진다. 고교 1년, 개교기념행사를 위한 합창단원으로 뽑혔다. 음악선생님의 간단한 오디션을 거쳐 목청 하나 좋다는 이유로 선발된 것인데도 우쭐할 정도로 신이 났었다. 두 세 곡 부른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제목이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미국 민요의 왕이라는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작곡의 “캔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뿐이다. 바로 반박자로 인하여 자존심 상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기억에서 영 지워지지가 않는다.
공부위주인 학교라서 충분한 연습은 못했다. 개교기념행사 날,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올라서자 반박자 늦게 시작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합창이니 대충 따라 부르면 될 것을 마치 리드싱어(lead singer)라도 되는 양 홀로 완벽하려 한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나 혼자 반박자 먼저 “캔터키~”하고 들어갔다. 공연장의 홀이 넓고 전교생이 모인 자리이니 표는 안 났지만 어찌나 당황이 되든지. 얼른 고쳐 부르긴 하였지만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내내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양 안절부절못했다. 정작 지휘하시던 음악선생님은 알아채지도 못하신 것 같았는데도 자격지심으로 인하여 음악선생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무리 우리와는 상관없는 미국 민요이지만 민요는 부르기 쉽게 작곡하였어야지 반박자 늦게 들어가도록 작곡하여 헷갈리게 한 작곡가 포스터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무슨 대단한 노래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들어가면 될 것이지 굳이 반박자 늦게 들어가도록 한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원망스런 반박자 때문에 나 홀로 망신당한 모멸감으로 인하여 한동안 기를 펴지 못했다. 지금도 운동경기를 관람하면서 누가 “반박자 운운”하거나 머릿속에 “반박자만”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때의 “켄터키 옛집공연”이 기억나 무안해지고 괜히 헛기침이 나온다.
연습부족이었다. 연습을 더 하였더라면 반사적으로 노랫말이 튀어나와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다. 어차피 기회가 늘 오는 것은 아니다. 절호의 찬스는 일생에 불과 몇 번 안 온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에 부단한 노력으로 순발력을 길러야 한다. 기회는 잡으려 애쓰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겨우 반박자에 불과한 작은 차이이지만 잡으면 승리자, 놓치면 실패자가 되는 것, 그것이 기회이기 때문이다.
유재복 판사는...
現 대전 지방법원 금산군법원 판사
「늦깎이 시골판사의 세상보기」
「시골판사 유재복, 더불어 행복을 찾는 지혜」저자
·대전에서 소위 '잘 나가던'변호사였던 그는 2001년 시골판사 생활을 자청해 현재까지 대전지방법원 금산군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