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와 영어 실력
상태바
법률가와 영어 실력
  • 문재완
  • 승인 2008.07.25 11: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완  한국외대 교수 헌법학·미국변호사 

 

출범 6개월도 안 된 이명박 정부에 민심이 떠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륀지’에서 시작된 것 같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은 ‘오렌지’하면 외국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 ‘어륀지’로 발음해야 하며, 외국어 표기법도 그렇게 수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역설했다. 인수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어 이외 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몰입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후 영어몰입교육은 영어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호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없던 일이 됐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이명박 정부의 행보는 그 후에도 계속 돼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은 틀린 정책이 아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고 있는 것은 현실이고, 영어를 잘 하는 학생에게는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역시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직시한다면, 영어교육은 공교육이 담당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둘 경우, 부모 잘 만난 학생은 조기유학 갔다 오고 학원 다녀 영어를 잘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은 영어를 잘 못하는 영어 양극화가 더 심화될 수 있다. 다만, 인수위가 잘못한 것은 영어 발음에 집착하면서 진지하게 논의하여야 할 과제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 데 있다. 영어가 미국인의 언어가 아니고, 세계인의 말이 되고 있는 점을 직시하였다면 발음 역시 미국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미국 영어에 익숙한 사람도 영국 영어, 필리핀 영어, 인도 영어를 듣다 보면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세계어로서 영어의 발음은 그만큼 다양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률가에게 영어는 얼마나 중요할까?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는 것은 분명하다. 독해를 잘 하면 미국 westlaw나 lexis-nexis에서 미국의 법령과 논문을 찾아 볼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 법제와 판례에 미국이 주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으며, 그 비중은 날로 늘어나고 있으므로 영어로 된 문서를 빨리 읽을 수 있느냐는 법률가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영어에 귀가 트였다면, 인터넷에 널려 있는 미국 로스쿨 교수의 강의, 세미나 발표 등을 직접 들으며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책으로 보는 것과 강의를 듣는 것과는 효과 면에서 천지차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어로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또 영어 논문을 쓸 수 있다면 그러한 법률가의 앞에는 넓은 세상이 열려 있음에 틀림없다.


문제는 영어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어를 잘하면 좋은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지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학생에게 영어가 중요하다고 떠드는 것은 고문이다. 특히 대학에 입학한 후 영어와 담을 쌓고 살아온 대부분의 법대생, 그 중에서도 사법시험 준비생에게 영어는 가장 자신 없는 분야다. 앞으로 로스쿨 시대가 되면 영어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하니, 이런 학생의 걱정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영어가 로스쿨 입학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거나 훌륭한 법률가가 되는데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영어를 잘할수록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어 잘하는 것과 법률가로서 잘하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영어를 경시하였던 사법시험 체제로 1만 명이 넘는 법조인을 양성하여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법시험 체제 아래서도 훌륭한 법조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소위 잘 나가는 법조인 중에 영어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사실은 법과대학 교수들이 잘 안다. 그러니 법과대학 교수들이 로스쿨 교수가 된 우리나라에서, 영어 실력으로 로스쿨 신입생을 모두 뽑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아마도 많은 로스쿨이 신입생의 구성에서 포트폴리오를 짤 것이다. 그 포트폴리오에는 영어를 잘 못해도 다른 분야의 성적이 뛰어난 학생 그룹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학교마다 그 비중은 다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고 끝내자. 영어 공부는 지금부터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