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권위와 흙탕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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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권위와 흙탕살이
  • 법률저널
  • 승인 2008.06.2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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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촛불로 상징되는 2008년 6월은 권위의 상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때 권력이 권위를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은 사람들을 공포의 함정으로 몰아넣었고, 감시의 눈길은 사람들의 심장을 옥죄어 왔었다. 그러한 권력의 강제력이 무서워 모두들 머리를 숙였고 무릎을 꿇었다. 안으로 치솟는 분노를 다독거렸고, 수모를 감내하며 피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권력의 무한남용이 민주화 물결로 스러지고 만 오늘, 그 자리를 대체할 “우리의 가치”가 실종상태여서 암담하다. 권력의 절대공백 속에 이제 구성원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권위가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생성되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이들의 삶의 수준이 천정부지로 치솟아버린 21세기에는 태산처럼 우뚝 솟은 권위자를 찾기가 참으로 힘들다. 모든 이들이 적당히 교육을 받은 적당한 지식인층이 되어 적당히 자기 의견을 피력하게 되었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적당히 돈을 번 적당한 부유층이 적당히 자기 재물을 즐겨 쓰게 되었고, 인터넷의 발달로 적당히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적당히 남에게 휘둘리지 않게 되었으니, 어느 누군들 맹목적으로 누군가의 권위에 복종하려고 하겠는가? 모두가 권위자가 되고자 하면서 아무도 권위자가 되지 못하는 이상한 엘리스의 나라가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21세기이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인사청문회 제도는 그러한 권위의 붕괴를 한 발 앞당기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예전에는 대통령 구미에 맞으면 아무나 장관 자리에 앉혔고, 청와대의 무슨 수석이니 하며 앉힐 수 있었다. 그들의 실체는 감추어졌고, 권위는 부풀려졌었다. 무슨 무슨 部 長官은 말 그대로 副長官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며 국민을 더욱 곤고하게 했고, 무슨 무슨 首席은 말 그대로 깨지지 않는 水石이 되어 돌처럼 단단한 머리로 맨땅에 헤딩만 해대었으니 국민들 머리통이, 가슴팍이 얼마나 멍들었겠는가?


그러나 인사청문회제도가 도입되면서 그들의 실체는 까발려졌고, 발가벗은 임금님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부자가 된 경위가 밝혀지고, 학자적 양심을 지켰는지가 밝혀지고, 공직생활 중 살아온 삶의 주요행태가 밝혀졌다. 그들의 능력이 과대포장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들이 함량미달의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졌다. 한때는 겉 번지르르하게, 그럴 듯한 포장으로 자신을 채색하고, 그러한 채색에 속아주었던 국민들이 그들의 앞뒤 다른 언행에, 사리사욕을 위한 흙탕살이 삶을 적나라하게 알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누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며, 그들의 인격에 승복을 하겠는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술래잡기가 허용되지 않는다. “나 찾아봐라” 하고 전봇대 뒤에 숨고, 굴뚝 뒤에 숨고, 장독대 뒤에 숨어 자신을 감추고 즐거워하던 어린 시절의 술래잡기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GPS로 상징되는 추적시스템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까발리고 공공연히 드러내 버린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면서도 올바르게 살아가야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교통카드 사용 흔적이 우리의 행동반경을 밝혀주고, 신용카드 사용이 우리의 삶의 패턴을 정형화하고, 손전화기 사용 결과가 우리의 위치와 인간관계를 밝혀준다.


권위 있는 정치 지도자 부재의 나라, 삶의 모습을 닮고 싶은 종교 지도자가 많지 않은 나라, 올바르게 돈을 번 부자가 흔하지 않은 나라, 진리를 찾아 목숨을 바치는 학자를 찾기 힘든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어쩌랴,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찾아야 할 수밖에......


권위는 탑과 같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쌓을 수도 없지만,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권력이 상실한 자리에 권위가 자리매김하기에는 탑을 쌓는 시간과 정성이 상당기간 그리고 상당량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과도기, 권력과 권위가 존재와 부존재의 경계를 어중간히 넘나드는 곤혹의 세상을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권위를 세워가야 하고, 권위 있는 자 앞에서 승복하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말로 가르쳐야 하고, 행동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좌가 우를 인정해야 하고, 우가 좌를 인정해야 한다. 촛불은 하나인데도 그를 치켜들고 포효하는 인간들은 다르고, 전면 부정과 전면 투쟁의 대결구도만 곤고화되고 있다.


촛불이 아무리 밝은들 아침의 햇살 한 옴큼만 하랴? 그러니 우리 촛불들은 촛불의 한계를 깨닫고 햇살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발 양보하여야 하리라 본다. 촛불은 빛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소리로 말해야 한다.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 권위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질 집단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 생각하기에 좌측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 적을 이기는 최대의 병법은 적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되면 반대세력이 없게 되어 올바른 비판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적이 자기편이 되어 협조하면 공동체의 최대 선을 이루어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적을 자기편으로 만들라는 나의 이 공허할지도 모를 주장은 다른 말로 말하자면,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시오”라는 말이다.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면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권위를 인정받은 상대방 역시 당신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힘을 가진 많은 이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가 먼저 굽히고 들어올 것을 강요한다. 그렇지만 약한 자는 그 마지막 가진 하나를 내주어버리면 아무 것도 없는 무방비상태가 되기 때문에 결단코 내어놓지 않는다. 까닭에 많이 가진 자가 먼저 내어 놓아야 상대방이 신뢰를 가지게 되고, 신뢰가 느껴져야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 값에 화물차 운전자들이 연대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고, 물류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유류가격의 폭등에도 화물운송비를 올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화주들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후안무치하다. 당연히 올려줘야 되는 것 아닌가?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은가? 당연히 올려줘야 할 것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도둑놈 심보하고 뭐가 다른가? 그러니, 그런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사니 권위가 생길 리 없고 손가락질당하고 욕먹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양보하라, 그리고 상대방의 권위를 먼저 인정하라. 그것만이 이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한순간에 잠잠케 할 유일한 묘책이다. 이제 제발 끼리끼리 어울려 놀지 말고, 말 그대로 난장판으로 나와 난장질을 좀 해보자.


권위는 탑이다. 탑은 어머니가 가장 먼저 찾아 두 손 모으는 기도처다. 우리 모두 어머니 마음이 되어 공동체의 탑을 쌓자. 탑을 쌓자. 언제까지나 무너지지 않을 믿음의 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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