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양초-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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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양초-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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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5.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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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오시영 - 숭실대 법대교수, 시인, 변호사

가정의 달인 오월이 지나간다. 모든 이들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소망한다. 젊었을 때는 성공한 삶의 기준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 잘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차 세상을 살다보니, 성공한 삶이란 다름 아닌 따뜻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정을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었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족 사이에 신뢰와 따스한 위로가 넘치는 가정, 부자가 아니더라도 서로 나눔이 있는 가정, 세상에서 잘나지 못했더라도 서로가 아끼고 위해주는 가족들이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행복이자 성공이라는 생각이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는 언제나 기도 중이다. 자식을 갖기 위해 기도하고, 가지고서 기도하고, 낳고서 기도하고, 키우면서 기도한다. 세상의 모든 자녀는 부모의 기도 눈물을 먹고 자란다. 더러는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정말 잘못 되어도 너무 잘못된 사람들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는 종교를 가졌든 아니든 간에 자녀를 위해서는 신에게 무릎을 꿇는다. 자녀를 위해서는 교만해질 수가 없다. 아이가 부모의 기도를 알든 모르든 괘념치 않는다. 오직 촛불 하나 밝히고 아이가 신의 보호 아래 있기를 기도하고, 그의 앞길이 순탄하기를 절실히 간구한다. 부모의 기도를 먹고 자란 자녀는 잘못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아내는 아들이 군에 가 있는 2년 동안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군에서 땀 흘리며 고생하고 있을 아들 때문에 집에서 편하게 에어컨을 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세탁기 빨래를 하지 못했다.

 

일일이 손빨래를 하면서 아이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그러는 아내가 조금은 답답해 보였지만, 그게 어머니의 마음이려니 싶어 이해하려고 했다. 그 아들이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지도 어언 일 년이 지났다.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아이가 없어 애를 태웠던 아내는 아이 갖기를 소망했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 덕인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결혼 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임신을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 형제의 축복을 아들에게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아이는 무탈하게 혼자 꿋꿋이 잘 자랐다. 고교시절에는 음악에 심취하여 공부는 뒷전이고, 드럼에, 전자기타에 열광하더니, 대학은 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나의 권고를 받아들여 간신히 대학에 진학을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 철이 들었는지 제 전공분야에 몰두하며 새벽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더니 다음 학기에는 교환학생이 되어 미국의 모 대학에 일 년 동안 수학할 예정이다. 제 앞길을 갈고 닦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장성한 아이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어제는 아들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아들의 생일날, 나는 기도했다. 이 젊은 청년이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게 해달라고,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자신의 지성과 양심을 팔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들을 통해 많이 이들에게 기쁨이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아들이 그러한 헌신의 삶을 기꺼이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기도의 강도는 높아갈 것이다.


  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항시 촛불 한 자루 켜놓은 심정이다. 내가 촛불이 되고, 아들이 촛불이 되기를 바란다. 자신의 일생 동안 남을 위해 헌신하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쉽게 꺼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전기 사정은 참으로 열악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석유와 양초가 담배와 더불어 가장 많이 팔리는 인기상품이었다.

 

양초야 부잣집에서나 불 밝히는 것이어서 주로 석유 호롱불을 켰던 게 서민의 생활이었다. 양초는 집에 제사가 있을 때나 제상에 차려놓기 위해 샀을 뿐이었고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성냥과 더불어 최고의 방문선물이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아껴두신 양초는 제사 마친 후 언제나 막내였던 내 몫이었다.

 

석유 호롱불에 비해 밝기가 유난했던 촛불에 대한 동경은 그때부터 생겼는지 모른다. 제사를 마친 후 양초를 내 방으로 가져와 촛불을 켜 책을 읽던 기쁨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흔들리는 촛불에 따라 방의 명암이 흔들리는 모습도 내게는 경이롭게 신비롭기조차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셔서 종래의 예법에 따라 제사를 지냈었다.

 

언제나 별다른 말씀 없이 묵묵히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 말씀 없으셨어도 아버님의 마음은 내가 지금 내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보다 더 절실하셨을 거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생활환경이 그때야 지금보다 더 절박함이 많았던 시절이니 더 하셨으면 더 하셨지 못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셨을 거라는 철이 이제야 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에 전기가 들어와 촛불을 더 이상 켜야 할 이유가 없어졌지만, 촛불은 항시 내게 아련한 추억이다. 그 촛불은 나중에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크리스마스 성탄절 새벽송을 돌면서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 길을 밝히는 성례의 불 밝힘으로 내게 승화되어 있다.


전깃불의 밝음이 촛불을 무의미하게 만들 줄 알았다. 그 오래전 촛불을 현실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의 촛불은 오늘의 상징으로 여전히 우리의 앞길을 밝힌다. 세상은 그 때의 어두운 밤길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지만, 지금도 촛불을 필요로 할 만큼 세상은 어둡다.


 청계천과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의 행진은 장엄하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결정한 정부의 무분별한 정책과 광우병 염려가 촛불시위의 전면에 나서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슬픔이 내 눈에는 선연히 보인다. 촛불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밝은 대낮보다 더 밝은 청계천의 전기불빛, 야간조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앞길이 어둡다고 느끼는 수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촛불 밝히기가 나를 슬프게 한다. 거기에는 강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소외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 그 민심을 읽지 못하는 배부른 위정자들의 무심이 나를 슬프게 한다.


 가정의 달이 저물어가고 있다. 모든 이들의 가정에 희망의 촛불이 밝히 켜지기를 바란다. 그 촛불이 어둠을 쫓아 모든 이의 마음에 사랑으로 번져나가기를 소원한다. 갑자기 전기가 끊겼을 때 비상용으로 불 밝힐 양초 한 자루 준비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세상의 모든 아들이 비상용 양초처럼 부모에게 비축된 한 자루 삶의 양초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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