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자 시인의 잉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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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 시인의 잉크-5
  • 법률저널
  • 승인 2008.05.1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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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게임의 법칙
                                                                                                     
  동그라미보다 동그라미라는 말이 더 부드러운 까닭은 그 느낌 속에 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동그랗게 태어났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각종 모서리에 부대끼며 본연의 모습을 잃어간다. 어느 하루인들 경쟁에서 떠날 수 없지 않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기에 적응해야 하고, 빛과 어둠의 강렬함을 흡수해야 하며, 감각/지각을 동원하여 먹이를 삼켜야 할 뿐 아니라 수많은 병원체와도 싸워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무한게임은 시작된 셈이다. 게임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긴장→도취→쾌감→안온으로 이어질지 모르겠다. 좀더 거칠고 팽팽한 결구 ‘성공’이라 짚어도 무방하리라. 그러므로 모든 실존은 무차별적으로 성공에 내몰린 화살들이다. 꽃 피고 새 우는 가운데 태양은 이슬을 뿌려 대지를 위로하지만 무시무시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성공보다 더 크고 무서운 아가리를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집어삼키지 못할 것이란 없다. 무릇 태어나지 않은 자만이 출혈하지 않는다.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먼 나라로부터의 꿈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태어남은 먼 나라로부터의 ‘이룸’ 혹은 ‘이김’의 상징이다. 인과가 이와 같으니 나는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을 이긴 자의 고뇌로 본다. 우리가 한 마리 벌레(情蟲)였을 때 많은 정자와 난자들을 제치고 이기지만 않았던들 오늘날의 고통이 왜 뒤따랐겠는가. 이 풍진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을 맛보지 않고도 영구평화 속에 잠들었을 것을, 왜 생명체가 되고자 욕심을 내어 덤볐는지 역시 벌레의 행위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버러지 인간’이라고 내뱉는 욕설도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허사가 아닌 진실에 속한다. 우리는 너나없이 시간 앞에 눈뜬장님! 한 치 앞을 예단할 능력도 부여받지 못했다. 시간을 더듬어 줄 지팡이가 있었다면 우리의 현실은 좀더 둥글었겠지! 그러나 이 말 뒤에 튀어나올 저 말조차 가늠하지 못해 콩팔칠팔 티격태격 동그라미는 찌그러지고 뒤틀리고 결국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가 되고 만다.
 
  이긴다는 의미를 나는 물리적 차원에 두지 않는다. 외적으로 계산했을 때 다소 손해를 볼지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쪽을 이김의 준거로 삼는다. 『아큐정전(루쉰箸)』에서도 ‘정신승리법’이라는 일종의 게임의 법칙이 나오는데 그 또한 세상에서 졌어도 자기 스스로 정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산법이다. 이 승리의 법칙은 존 내쉬의 ‘게임이론’보다도 월등 쉽고 절대로 패자가 되지 않는 우수법칙이다. 길고도 험한 인생에서 나만의 게임의 법칙 하나쯤 갖고 있다면 잠 못 이루는 많은 밤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손익분기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관건일 텐데, 그 점은 각자의 철학과 비전이 저울눈이 되어지리라. 점점 넓어지는 창 밖의 후박나무 잎새를 바라보면서 저들도 게임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식물의 게임의 법칙은 자기를 위한 룰이기보다는 타자를 위한 푸르름인 게 분명하다. 나무들은 성자의 법칙을 이행하는 하느님의 현신인 것만 같다. 나무=관세음보살!
 
  물론 나에게도 독자적인 게임의 법칙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게임의 법칙이 아니라 ‘기권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가령 두 사람 사이에 게임이 벌어졌다 치자. 결과는 정확히 한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또는 두 사람 다 이익을 쥘 것이다. 그렇다면 손해 보는 쪽이 나 자신일지라도 그 게임은 ‘괜찮은 게임’이다. 그러니 끝까지 기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둘 다 손해나는 게임이라면 그 게임은 ‘나쁜 게임’이므로 기권한다. 그리고 세 사람 사이에 게임이 벌어졌을 경우. 1)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갈 확률. 2)두 사람한테 이익이 돌아갈 확률. 3)한 사람한테만 이익이 될 확률. 4)세 사람 모두 이익일 확률 5)세 사람 모두 손해날 확률을 내포한다. 그럴 때 나는 1). 2). 3). 4)번 모두 괜찮은 게임으로 여긴다. 이익과 손해가 누구 몫인가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5)번과 같은 상황이라면 단호히 기권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 게임은 ‘폭삭 게임’이기 때문이다. 폭삭 게임은 숫자 ‘0’의 상태가 아니라 관계자 전원의 응보에 마이너스 효과를 초래한다. 자잘한 승부보다는 인간됨이 최우선!
 
  다시 말해 나의 게임기준은 이익이나 손해에 있지 않고, 좋은 게임이냐 나쁜 게임이냐에 달렸다. 누가 이기더라도 좋은 게임이라면 끝까지 성실을 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올림픽 같은 게임일 경우 우리나라가 1등을 못한다 해도 그것은 세계평화를 위한 좋은 게임이므로 개인적/국가적으로 경제와 시간을 바칠 가치가 있다. 내가 시를 읽고 짓는 행위도 결코 이익이 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승산 없는 물질과 시간, 에너지를 끊임없이 들이부어야 한다. 하지만 그 게임은 문학이라는 단체의 일 개 톱니를 형성하는 ‘좋은 게임’이므로 긋거나 굴하지 않고 일편단심 꼼지락거린다. 우리의 일상에는 낱낱이 공개할 수 없는 일화들이 우후죽순이다. 그때마다 이김에만 매달린다면 인간의 모습보다는 악령의 출현을 증명하고 말 것이다. 진정한 게임의 묘미란 물러서고 나설 줄 아는 분별력에 있다. 자기보다 약하거나 잘못 없는 이에게까지 막무가내 송곳눈을 박고 설친다면 그를 일컬어 무뢰한이라 할 밖에.
 
  어느 지점에선가는 꼭 마음에 드는 무엇인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식물의 빛과 겸손에 흠뻑 빠져들던 내 젊은 시절, 설악산 골짜기에서 녹색우단이끼를 입고 앉은 돌멩이 하나가 눈에 꽂혔다. 나는 그 죄 없고 평화로운 돌멩이를 즉시 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푸른 돌멩이가 느닷없이 인간과의 게임에 걸려들어 속수무책 완패한 것이었다. 나는 그 전리품을 난초 곁에 모셔 놓고 매일 안개를 뿜어 산골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끼는 숨을 거두었다. 순간적인 내 소유욕 때문에 살악산은 돌멩이 하나를 잃었고, 돌멩이는 이끼를 잃었으며, 이끼는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적잖이 죄책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이끼는 살려낼 수 없을지라도 돌멩이한테는 고향을 찾아주어야 했다. 나는 죽은 돌멩이를 가방에 넣고 설악산 기슭을 찾아가 아무도 몰래 제자리에 앉혀놓고 돌아왔다. 이 폭삭 게임의 전말이 참으로 무안하다. 내 마음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 돌멩이도 지금쯤 초록빛에 싸여 반짝이고 있을까. 그리고 이번엔 또 하나 괜찮은 게임 이야기↙ 
 
  오래 전에 놓아준 거북이 떠오른다. 계절적으로 이맘때였을까. 아직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한강변 산책을 나갔었다. 한곳에 멈춰 강물을 바라볼 즈음 손바닥만한 거북 한 마리가 내 발치로 기어들었다. 살펴봤더니 온몸에 시꺼먼 기름때가 덮여 있었다. 아차! ‘얘가 살려 달라고 찾아 왔구나’ 거북을 집으로 데려왔다. 깨끗이 씻긴 뒤 욕조에 수석을 넣고 섬도 꾸며주었다. 그런데 거북은 먹지도 않고 연일 그 바위에 올라 망연한 눈빛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눈에 담긴 그리움을 읽으려 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에의 향수일 거라고 해석했다. 오염도 높은 한강에 도로 입수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맑고 안전한 호수라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떠올린 장소가 속리산 법주사 길에 보았던 방죽이었다. 날짜를 잡아 작은 물통에 거북을 넣고 속리산행 버스를 탔다. 보은에서 내려 무작정 택시를 잡아 방죽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님 말씀에 의하면 거기가 ‘삼거리 방죽’이라고…. 나는 쪼그리고 앉았다.
 
  거북을 방죽에 넣어주자 쓰윽 헤엄쳐 내려갔다. 서운하다 싶은 찰나에 수면으로 떠올라 돌아보더니 다시 하느작하느작 잠수해 들어갔다. 나는 그 작별이 영원한 별리임을 알기에 약간은 슬프고 행복했다. 투명한 물결 아래 일렁이던 햇살! 시간과 교통비를 들였지만 그건 거북에게 복을 준 일이었기에 좋은 게임이었다. 살아가는 일 모두가 게임 아닌 게 없다. 타인과의 경쟁도 그렇거니와 순간순간 자신과의 싸움도 만만치 않다. 제1 제2 제3의 자아가 늘 상호문답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 또한 유형을 달리한 꿈이 아닐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양과 체험을 쌓아야 본래의 동그란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 후박나무만큼 담담히 사계절과 새들을 받아들이고, 바람과 구름에도 화합하며 묵묵히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엄청 가슴 아픈 일을 당하면서도 푸른 잎 사이로 순한 꽃송이를 꺼내 보일 수 있을까. 성공보다는 성실에 더 마음 쏟으며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초연해질 수 있을까.
 
 정숙자 시인은 1952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다. 1992년 동국대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으며, 1997년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들소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등이 있다.
정숙자 시인의 잉크는 매월 셋째주에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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