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시집 한 권 사시지 않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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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시집 한 권 사시지 않으실래요?
  • 법률저널
  • 승인 2008.05.0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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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오월의 햇살이 따사하다. 이렇게 따사한 햇살이 내려 쪼이는 날, 실용주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가치는 점차 매몰되어 가고 있고, 이 삭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편의 시를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현란한 볼거리로 넘쳐나는 영상물 비디오 세상에서 아무런 빛도 없고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세계인 시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서재에서 헨델의 사라방데를 들으며 서가에서 “나그네는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꺼낸다. 시집의 간지에는 “오시영 회장, 이천이년 여름, 대여 김춘수”라는 김춘수 선생님의 자필과 낙관이 찍혀 있다. 내가 현대시학 회장 일을 맡아보고 있던 때에 대여 선생님께서 일본인 시인 니시와키 준사부로의 같은 제목의 시를 번역하여 발간한 시집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대여 선생님께서 타계하신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대여 김춘수 선생님께서 위 시집 이후에 마지막으로 내게 주신 시집은 “애가”였다. 나이 팔순이 넘은 김춘수 선생님의 마지막 시집이 “사랑의 노래”였다는 사실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다. 인생에서 죽는 순간까지 사랑은 영원한 테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니시와키는 현란하고도 슬픈, 풍요롭고도 쓸쓸한 패러독스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일본 현대시의 1세대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인이다. 생의 말미에서 김춘수 선생은 니시와키 시인의 위 제목의 시가 가슴에 와 닿았나 보다. 그러기에 일본시를 열심히 번역하여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래된 성경 시편은 인생을 이미 나그네길이라고 역파하고 있었는데도 모든 인생의 말미에 선 오늘의 우리는 역시 동일한 절규를 쏟아놓고 있다.


니시와키의 시 “나그네는 돌아오지 않는다”의 한 구절은 “나그네는 기다려라/이 희미한 샘에/혀를 적시기 전에/생각하라 인생의 나그네/그대 또한 바위 사이로 스며나는/물의 넋에 지나지 않는다/이 생각하는 물도 영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영겁의 어느 한때에 말라버린다/.....(후반부 생략)”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 책을 내시던 때 팔순이셨던 김춘수 선생님께서는 팔십 평생 살아온 삶의 뒤안길에서 한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이라는 영겁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나그네 길이었다는 진실에 깊이 천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동료시인 노명순 시인의 “눈부신 봄날”에 수록된 시 한 편을 떠올린다. “쳐다만 보아도 감물 들어 버리는/홍시/어머니가 기도의 그리움으로/걸어놓은 까치밥//저무는 하늘에 온 몸과 마음 뜨겁게 불살라/떠놓은/붉은 물 한 사발의 정화수//까치떼가 몰려와 빨간 홍시를 덮친다//달디 달다”-(“일몰이 달다” 전문). 노을과 홍시의 붉게 익어가는 모습을 연상 작용시키며 그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에서 자식이 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까치밥을 준비하시는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좋은 시이다. 김종해 시인의 시 “노을”은 “내가 사는 곳은 인왕산 밑이다/맑은 날 저녁 자세히 보면/인왕산은 날마다 해 하나를 잡아먹는다/해 하나를 다 삼키고 나면/그 언저리는 피처럼 붉다/저녁이 오기 전에/인왕산은 제 누운 자리에다/재빨리 검은 천을 깐다/나는 아버지ㆍ어머니를 여윈 천애고아/ 해가 잡아먹힌 것을/누구에게 물어볼까/내일 아침 하나 떠오르지 않으면/인왕산은 나를 잡아먹으러 내려 올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노명순 시인은 홍시를 바라보며 붉게 타오르는 노을빛 태양과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연상해냈고, 육십 대 중반에 이른 김종해 시인은 인왕산 노을빛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에의 귀의를 생각하며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할지 물어볼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면해야 하는 인생의 막막함을 토로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니 마지막 노을빛을 바라보며 그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몇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주는 좋은 시이다. 무한정으로 남아있을 것 같은 시간은 실제로는 모든 인간에게 얼마 남지 않은 한정판매상품이다.


니시와키 선생의 시 제목처럼 모든 인생은 돌아오지 못할 나그네 길을 열심히, 맹목적으로 걷는 바보들일지도 모른다. 나그네에게는 집이 없다. 아니 그러기에 세상 모든 곳이 나그네의 집이다. 나그네는 집이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유무상통의 합일의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다. 곡물가 폭등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어린이들이 아사상태에 빠져있는 뉴스를 보며 절망하게 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을 비롯한 각종 물가 앞에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부에 전념해야 할 우리 세대의 청년들이 값싼 시간급의 일당을 받으며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 나를 좌절케 한다.


오월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하는 가정의 달이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달인데도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춥고 배고픔을 절실히 느껴야 하는 차가운 달이다. 인생을 이순쯤 살아온 저 시인들의 눈에는 인생이란 홍시처럼 금방이라도 터져 벌릴 듯 위태위태하면서도 마지막을 불사를 수도 있는 황금빛 낭만으로 비춰지는지도 모르겠다. 하면서도 세 분의 시인이 공통으로 바라보는 인생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스스로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어린 아이가 되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고,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그 경건한 모습을 사뭇 그리워하며 아파한다.


약육강식이 세상, 승자독식의 처절하고 냉엄한 세상이지만, 나와 함께 하는 독자들은 일생 동안 한 권의 시집을 가슴에 품고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철마다 한 권의 시집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을 찾는 그 삶의 여유와 사랑, 그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언어의 깊이를 가슴 깊이 느끼며 스러지는 별빛을 사랑할 귀한 분들일 테니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자정이 넘은 깊고 고독한 시간에 한 줄의 아름다운 글을 찾아 또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모두들 나를 잊고 깊이 잠든 이 시간에 홍시처럼 발그레한 볼을 하고 어머니의 기도와 아버지의 무등을 떠올린다. 어찌 평생을 사랑하며 살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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