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바코드,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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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바코드, 중독
  • 법률저널
  • 승인 2008.03.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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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믿는 나는 요즘 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추악한 인간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넘쳐나는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신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을 하면 신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스스로 인간을 심판하는 자라고 자부하며 천지창조 이래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신은 끊임없이 인류를 심판해 왔고, 그 심판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인류는 온몸으로 발버둥 쳐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나보다. 헤아릴 수 없는 중독이 넘쳐나는 사회, 중독된 인간은 더 이상 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중독된 인간의 바코드에 찍혀 있는 것은 오직 탐욕과 음심, 자포자기와 철저한 파괴뿐이다. 바코드에 찍힌 가장 무서운 중독은 가난이다. 끼니를 굶고, 내일이 보이지 않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중독이 무엇이 있을까? 가난에 중독된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옛말 하나 그르지 않다. 가난으로 중독된 세상에서 신은 길을 잃는다. 인간을 앞장서 인도하는 신이 방향을 잃어버리면 인류의 칼춤은 이제 신바람이 아니다. 철저한 자기 파괴와 타인 저주로 귀결될 뿐이다.


끝내 그 아이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안양의 한 초등학교 아이인 우예슬양과 이혜진양이 실종 수십 일만에 살인범 정모씨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신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할 수 있는지 이 아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져버린 아이들의 시신이 끔찍해 부모마저 입관할 때 시신 보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천사 같았을 아이들의 찢겨 발겨진 시신은 우리의 마음 또한 갈갈이 찢어놓는다. 범인이 사는 한 칸 방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산처럼 쌓여있었다고 한다. 범인이 구석진 방에 홀로 앉아 탐익했을 비디오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이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을까? 그 살인범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던 날, 이창동 감독의 “밀양-Secret Sunshine"이 홍콩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필름어워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온다. 지난 해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씨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작품 밀양으로 말이다. 영화 밀양의 소재도 한 아이가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되고, 그것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웃 학원장에 의해 그 범행이 저질러지고, 신에 귀의하여 고통을 잊으려던 신애-전도연이 큰 결심 끝에 아이를 죽인 그를 용서하겠다며 교도소로 면회갔을 때, 그 범인이 태연스레 내뱉던 한 마디,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평안합니다라는 그 한 마디 말에 머리꼭지가 돌아버리던 전도연, 벌레처럼 웅크리고 앉아 울 수밖에 없던 한 엄마의 연기를 처절하게 펼쳐보이던 그녀가 또 다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 영화를 통해 신의 의미를 되새김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그 영화, 밀양을 잊어버린 지 오래인데, 그 영화는 살아서 다시 우리를 각성시킨다. 예슬이와 혜진이의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현대에서 신은 참으로 바쁘다. 인간의 인성을 발달시킨 업보를 지금 신이 치루고 있는 셈이다. 잔인함이 극에 이르고, 그 잔인함을 통제하는 인간의 잔인함 역시 극에 이른다. 과학의 발달은 죄를 쉽게 짓게도 하지만, 그 쉽게 죄지은 자를 끈질기게 추적하게도 만든다. 감시카메라가 그렇고, 유전자인식기술도 그렇다. 모바일폰의 사용기록도 그렇고, 신용카드의 사용흔적도 그렇다. 모두가 다 인간의 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니 신의 기록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신이 베푼 적선 하나 들라면 우리 인간에게 시간을 주었다는 것 정도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은 우리 인간을 밀폐된 공간에 파묻지만, 우리 인간은 그 시간을 통해 묻혀진 진실을 다시 파내기도 한다. 한 땀 한 땀 파내면서 시간과 싸움한다. 신은 시간을 통해 인간을 이기지만, 인간 또한 시간을 통해 신을 이긴다. 잘못을 방치한 신을 단죄하기 위해 인간은 대를 이어 진실을 밝히려 하고, 그 밝혀진 진실로 신을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또 얼마나 부끄러워지는가?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친박이니 친이니 하며 세를 규합한다. 야당이라고 다를까? 그럴듯 언어를 포장하지만 내심은 모두 탐욕이다. 모두 불쌍하다. 자기 정체성은 어디로 가고, 박에 기대어 이에 기대어 간신히 버티어 서보려고 하는 불쌍한 군상들이 자기들들 힘센 지도자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가당착의 현묘함을 본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도 여전히 언론탄압의 고리를 못 끊었다는 언론의 비판은 마찬가지이고, 환율이 급상승하고 물가가 급상승해서 국가경제의 위기가 시작되었다며 야단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9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임원 명의의 차명주식 형태로 관리하고 있었음이 삼성특검팀에 의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어디 그뿐일까? 밝혀진 것은 말 그대로 조족지혈이요, 빙산의 일각일 뿐일 게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고, 척 하면 삼천리인 게 우리네 세상사 아니겠는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코드인사가 맞지 않는다며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산하 기관장들의 사퇴를 협박하고 있음을 보면서 또 한 명의 꼭두각시를 보는 듯해서 현실과 티비 화면이 겹쳐오는 착시현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법에 의해 보장된 임기가 남아 있는 기관장들을 막무가내식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그의 행태를 보면서 주어진 대본에 따라, 짜여진 각본에 따라 연기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탈렌트를 본다. 자리가 역시 무섭기는 무섭다. 그렇게 코드인사를 한다고 비난하던 자가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으니 물러나야 한다고 아우성인 것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자기부정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코드인사는 좋은 것이다. 자기 맘에 맞는 자와 함께 하는 기쁨이 있으니 말이다. 신은 코드인사를 허용하고 있다. 신도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만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신은 시간을 두고 기다릴 줄 안다. 아니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드인사를 위해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가기를. 변하지 않는 게 인간이지만 시간은 변하지 않는 인간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예술이의 살인범, 그가 첨착했던 코드, 그 바코드에 찍혀 있는 인식문자는 중독이다. 비디오테이프 화면을 통해 살인과 방화, 약탈과 겁탈, 분노와 파괴에 중독되고, 현실을 통해 가난과 외로움에 중독된 그는 자기도착증에 걸린, 신마저 외면한 그냥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그에게 왜 따스한 신의 빛이 조금 더 일찍 쪼여지지 않았을까? 신, 당신의 직무유기가 이제 인간이 당신을 심판해야 할 때를 앞당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힘은 빛에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빛을 쏘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그 힘을 통해 어둠 속에서 쥐새끼처럼 아무도 몰래 온갖 추잡스런 작태를 반복하고 있는 이들에게 철퇴를 내려주면 됩니다. 당신을 위해 우는 인간이 더 이상 없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에게 출동을 명합니다. 자, 이제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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