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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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 법률저널 편집부
  • 승인 2002.01.0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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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24세·연세대 인문학부 4년

 

 <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Ⅰ. 들어가는 말


  
아직도 합격이 실감나지 않는 지금 이 글을 쓰려니 수험 기간 동안의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있습니다. 저의 경험담이 시험준비를 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이 글을 읽는 분 모두가 수험생활을 좋은 추억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Ⅱ. 대학생활과 외무고시의 시작


  
나는 96년에 대원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96년도 입시에서 힘든 경험을 하고 97년도에 연세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전공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다만 형편없는 내신성적 때문에 어문계열 특별내신을 받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실패와 시련을 겪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때 자신감도 많이 꺾였다.  희망차다기보다는 약간은 우울함 속에서 대학생활이 시작되었고, 1학년 때는 이런 우울함을 잊기 위해 써클활동에 전념했다. 특히나 1학년 2학기 때는 써클에서 임원을 하게 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모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때 써클 생활의 어려움과 여러 가지 힘든 일이 겹치며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중 처음으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너무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나날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목표가 없었던 나는 대학생활이 주는 무한한 자유가 너무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외무고시라는 단어를 접하는 순간 나는 목표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나 기뻐 외시를 봐야겠다고 즉시 결심을 굳혔다. 이 때가 2학년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러나 실제로 외시 공부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무척 힘이 들었는데, 결정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 문제가 무척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과연 내가 장래에 가정 생활과 직업 생활을 양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심각한 고민으로 다가왔다. 거의 한 학기 내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고민만 했다. 그렇지만 외시 이외에 별로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았고 고민만 하는 것이 너무 답답해서 일단 공부를 시작해서 붙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가 98년 7월달이었다.

 

Ⅲ. 외시공부의 시작과 33회 외시 응시
  
우선 33회 시험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33회 시험을 볼 때까지 1차 시험 준비는 정말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당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싫어서 혼자 주먹구구식으로 준비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련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로 컴퓨터 통신을 통해 정보를 얻으며 시험을 준비해갔는데, 외시는 그다지 정보가 많지 않아 혼자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33회 시험 준비는 정말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무조건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나중에 34회를 준비하면서 안 일인데 당시 나는 정말 남들이 잘 안보는 책으로 공부를 했던 것이다.

 

특히나 가장 실수했던 과목은 국제정치학이었는데, 처음에는 국제정치학이라는 과목이 독립된 것인지도 몰라서 가장 처음 산 책이 정치학이었다. 나중에야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이 있음을 알고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시험장에 갈 때까지도 국제정치학이라는 과목의 특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나는 33회 1차 시험에서는 65점이라는 점수를 얻으며 큰 점수 차로 불합격하였다. 33회에는 시사적인 문제가 대부분이었는데 뒤늦게 이론서만 읽었던 내게는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정책이라던가 영토분쟁 문제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나도 생소했던 것이다.

 

정말 국제정치학은 40문제의 대부분을 거의 다 찍기에 의존했는데 나중에 65점이라는 점수를 확인하며 오히려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33회 시험은 정보의 부족과 시행착오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33회 시험을 보며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감이 생기며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Ⅳ. 34회 1차 시험
  
34회에 다시 1차 시험을 보기로 결심하였지만 3학년 1학기는 학교 수업을 듣느라 바빠 고시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다. 이 때 미시 경제학과 거시 경제학을 동시에 수강하였는데 다소 힘이 들었지만 나중에 2차 공부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또 33회의 경험으로 국제정치학이 가장 방대하고 어려운 과목임을 깨닫고 국제정치학을 주로 공부하였다. 5월 달에는 한림 학원에서 윤경철 선생님의 국제정치학 강의를 들었는데, 아직 1차를 합격하지 못했고 사실 국제정치학은 거의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매번 꼬박꼬박 답안지를 써서 제출하여 첨삭을 받았다. 그 당시 리포트를 제출하는 기분으로 답안지를 쓰기 위해 여러 책들과 논문을 읽었는데 그렇게 했던 공부가 2차 때까지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3학년 1학기는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며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33회때 1차 시험에 떨어졌던 것이 결국은 국제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후에 2차 시험을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7월까지는 계절학기를 수강하고 8월부터 본격적으로 1차를 다시 시작했다. 33회 때 학교수업과 고시 공부를 병행한 결과 학점도 안 좋게 나오고 고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괴로움을 되살려 2학기 때에는 휴학을 하고 신림동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였고 일요일은 집에서 쉬었다. 집에서 신림동까지는 한시간 정도 걸렸는데 공부는 신림동에서 하였지만 잠은 집에서 잤다. 2차 시험 공부할 때도 계속해서 신림동과 집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을 하였는데 몸이 좀 힘들고 공부시간이 좀 줄어들었을 지는 몰라도 정신적 안정을 취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8월부터 9월까지는 신림동에서 헌법, 한국

 

사 등의 기본 강의를 들었다. 이 때는 남들이 많이 본다는 책으로 바꾸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헌법은 김학성의 객관식 문제집, 한국사는 김윤수의 「탐구한국사」, 국제법은 정영진의 객관식 문제집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는 매일 2시간 정도씩 투자했다.


   1차 공부는 정말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아무리 외우고 외워도 일주일만 지나면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3월 19일 시험 당일 날까지 계속 외우는 것을 반복하며 시험장에 들어갔다. 1차 공부할 때 가장 힘들었던 과목은 한국사였는데 34회 합격 후 점수를 확인해보니 한국사 점수가 67.5점이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한국사는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다.
  

 1차는 마지막까지도 불안함 속에서 시험을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1차 시험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2차 공부할 것이 걱정되었고 차라리 1차를 떨어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에 다시 복학하여 밀린 수업을 따라가느라 토익 시험을 신청하느라 정신없던 차에 1차 시험에 합격했음을 알았다. 그 때 내 점수는 커트라인에서 불과 0.5점 차, 한 문제 차이로 붙은 것이었다. 아찔하기도 했고, 1차도 너무 힘들게 붙었는데 내가 과연 2차 시험은 잘 준비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정말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할 때 기쁨보다도 2차 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Ⅴ. 35회 2차 시험 준비
  
1차에 합격했지만 2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했고 답답했다. 남들은 2차 때 스터디를 한다고 하는데 주위에 함께 공부하는 사람도 없어서 한동안 불안했다. 특히나 34회 1차에 불합격할 경우를 대비하여 휴학한 것을 조기졸업으로 만회하기 위해 전공만 21학점을 신청하였는데 1차 시험이 19일이어서 3월 20일부터 학교에 출석하였더니 출석문제와 밀린 진도, 리포트 등으로 너무 정신이 없고 하루하루가 힘이 들었다. 정말 1학기 때는 학교 공부를 하느라 고시 공부는 전혀 하지 못했다. 너무 불안하고 힘이 들었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도 찾기가 어려워 정신적으로 가장 괴로웠던 때가 1차 시험에 합격한 1학기였다.


   어느덧 7월이 되자 학교를 1년 휴학하기로 결정하고 안정된 공부 장소를 찾기 위해 다시 신림동 독서실로 갔다. 이 때쯤 각 대학마다 특강이 시작되었고 국제경제학, 국제경제법 등의 특강을 들었지만 마음만 급하고 제대로 공부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때 쯤에 우연히 스터디 멤버를 구하게 되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 4명이 만나 스터디를 시작했는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7월까지는 특강을 듣고 8월부터 본격적인 2차 공부를 시작했다. 그 동안의 시간이 너무 아쉬웠고 8월이 될 때까지 해 놓은 것이 없어 너무 불안했지만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8월에 미시 경제학부터 시작했는데 예전에 학교 수업을 들어서였는지 다행스럽게도 쉽게 진도를 나갈 수가 있었다. 1차 공부하면서 미시와 거시 수업을 들은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 8월부터 경제학을 처음 시작하려고 했다면 마음만 급하여 제대로 공부는 하지 못하고 좌절감만 커졌을 것 같다. 그나마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책을 느리게 보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이해가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더라고 꼼꼼히 편인데 경제학 역시 그렇게 공부했다. 미시는 이준구 교수의 책을 구석구석 읽고 혼자 식도 만들어보며 탄탄히 공부했고 거시는 정운찬 교수의 책을 꼼꼼히 보았다. 미시와 거시를 보니 어느덧 9월이 되었다. 상당히 책을 느리게 본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일회독을 했어도 경제학은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9월이 되어서는 국제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 8월부터는 선택과목인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제 2외국어는 상당히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보통 제2외국어는 1차 시험 공부를 할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1차 공부할 때도 보지 않았고 2차 시험 공부하던 중 8월이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했으니 상당히 불안한 출발이었다. 비록 대학에 와서 영문학과 독문학을 전공하긴 했으나 학부제로 바뀐 후에 독문과 수업은 거의 독일어와 무관하게 진행되었으므로 대학에 와서 배운 독일어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8월부터 독일어를 공부하며 35회 시험을 그럭저럭 볼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 실력덕분이었다. 독일어는 두 명이 작문 스터디를 하였는데 각자 작문 문제를 만들어와 교환한 후 실제로 답안 작성을 하고 서로 채점하는 형식이었다. 어려운 문제에도 대비하기 위해 작문 문제는 Die Welt, Der Spiegel 등의 시사적인 일간지, 주간지와 사시용 독해 교재 등에서 뽑아왔다.


   재정학 등을 비롯하여 모든 과목을 훑어본 후 12월말부터 학원에서 전과목 GS를 듣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모의 시험을 보는 것이었는데 GS는 3월초까지 계속해서 들었으니 시험 전까지 약 100번 정도 답안지를 작성해본 것이었다. GS를 들으며 시험에 떨어지지는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정말 모르는 문제가 나오더라도 답안지 10장은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차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과연 내가 답안지를 채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두려웠는데 계속하여 답안작성을 하다보니 어떻게든 답안지를 채우는 재주가 생긴 것 같다.


   3월말부터는 GS 듣는 것을 그만두고 혼자 정리하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답안작성을 해 보았다. 이 때부터는 시험에 대한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공부를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이 다가올수록 흔들린다고 하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는 너무 긴장되어 잠도 설치고 제대로 식사를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떨리고 긴장되는 가운데 4월 19일이 되었고 영어 시험을 시작으로 2차 시험이 시작되었다. 첫날 영어 시험을 볼 때는 긴장한 탓인지 작문을 할 때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독해를 하고 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작문은 답안지를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 났다. 국제정치학은 GS를 들을 때에도 항상 시간이 빠듯하여서 문제를 받자마자 되는대로 초안을 빨리 잡았다. 예상했던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답안지를 10장을 채울 수 있었고 다 쓰고 보니 10분이 남았다.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너무 빨린 쓴 것 같았다. 남은 10분이 너무 아쉬웠다.


   둘째 날부터는 긴장이 많이 풀려서인지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재정학은 매우 평이한 문제가 나왔는데 연습할 때처럼 답안을 작성하고 나니 20분이 남았다. 역시 답안작성을 많이 해본 것이 실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셋째 날은 경제학이었는데 워낙 범위가 넓은 과목이라 절반도 보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시험장에 갔다. 그래도 2차 공부를 하며 가장 좋아했고 고득점을 목표로 했던 과목이 경제학과 재정학이었는데 시험문제를 받자마자 배신감을 느꼈다. 3문제 모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며 특히 2번 문제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파생금융분야가 나왔다. 정말 고득점은커녕 과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포기하는 마음으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우선 1번과 3번을 부족하나마 그럭저럭 채우고 마지막으로 2번을 풀었는데 영 자신이 없었다. 파생금융분야는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선물환을 좀 쓰고 신문에서 읽었던 것과 약간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힘들게 답안지를 채웠다.


   다음날은 시험 과목이 없어 하루 쉬고 다섯째 날 국제법을 시험 봤다. 국제법은 목차를 위주로 한 번 보고 들어갔는데 역시나 예측 못한 문제가 나왔다. 정말 이번 시험은 소위 말하는 폭탄이 계속 터졌다. 1번 문제는 영공 침범 문제, 2번 문제는 전자상거래, 그리고 3번은 ICJ의 권고적 의견에 관한 문제였다. 1번 문제는 시험보기 직전 윤경철 선생님이 영공침범에 대해 보내주신 자료가 있었는데 마음이 급해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김대순 교수의 책 내용을 희미하게나마 생각하며 이번 시험은 참 운이 안 따른다는 생각을 했다. 2번 문제는 배점이 40점이어서 너무 당황했는데 전자상거래에 대한 개념마저도 제대로 잡히지가 않은 상태에서 전혀 모르는 것이었으나 아는 척 돌려썼다. 3번은 34회에 ICJ문제가 나와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것인데 1차 공부하던 기억을 되살려 쓸 수밖에 없었다.


   국제법이 끝나고 마지막 과목인 독일어를 준비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경제학과 국제법은 너무 못 본 것 같았다. 특히 경제학은 믿었던 과목인데 너무 속이 상했고 국제법도 50점은 못 넘을 것 같아서 독일어 시험을 볼 때는 거의 시험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였다. 더군다나 독일어 작문은 정말 황당하게도 생활 독일어 문제가 나왔다.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저기 있는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 프랑스 대학생이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갔다."등등 아주 기초적인 문제가 나왔다. 2차 준비를 하면서 생활 독일어는 뒷전으로 미루고 시사적인 문장에만 매달린 탓인지 오히려 일상에서 쓰는 말들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순간 머리가 멍해진 가운데 다소 황당하게 시험을 치렀다. 결국 작문은 평소 공부했던 어려운 표현은 써보지도 못했다. 그나마 작문을 큰 실수 안 하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몸에 알게 모르게 체화된 독일어에 대한 감각 덕분이었던 것 같다. 정말 작문은 지난 외시 준비기간 동안의 공부에서 쌓은 실력이라기보다는 고등학교 때 매일 독일어를 접하며 얻은 감으로 해냈다.


   2차 시험을 마치고 나니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시험보려고 공부했나하는 생각과 그 동안 자만에 빠져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일 등등이 후회가 되었다. 그렇지만 떨어지더라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떨어진다면 관운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하며 토익 시험을 신청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6월 8일 오후에 내가 2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고 정말 순간 너무 기뻤다. 그러나 3차에서 3명이 떨어지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또 다시 3차를 대비하여 스터디를 하였다. 시사적인 주제를 각자 맡아 예상질문과 답을 준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영어 면접도 연습하였다. 6월 22일 3차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29일 오후에 합격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합격한 것도 너무 기쁜데 수석합격이라니 정말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석이라는 기쁨보다는 합격했다는 기쁨이, 이제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Ⅵ. 맺음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외무고시, 그 동안 힘든 일도 많았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도 많았지만 이렇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저의 합격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는 부모님,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시간을 내어 저를 위로해준 학교 친구들, 마지막까지 한 배를 탔던 스터디 멤버들, 그리고 3차 시험 때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한림법학원의 윤경철 선생님 등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모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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