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고구마와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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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고구마와 사이다
  • 안혜성 기자
  • 승인 2024.01.12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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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안혜성 기자]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가방에 항상 책이 들어 있었다. 강의나 공부에 필요한 교과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강의 사이 사이에 뜨는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거나 해서 짬이 날 때는 항상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오히려 책을 읽기 위해 약속 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해 분위기 좋은 카페나 공원 벤치 같은 곳을 찾기도 했다.

책 말고도 유난히 좋아했던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영화. 매주 발행되는 영화 잡지도 자주 구매해 꼼꼼히 읽었고 당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다 봤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학교에 가다가도 마음이 동하면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영화관이 몰려 있는 종로까지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 번은 넓은 극장에 오로지 단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영화를 본 적도 있었다. 평일 대낮이었고 영화는 그리 흥행한 작품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유명한 모 일본 소설의 내용과 너무 비슷한 스토리에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각설하고, 영화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손해였기 때문인지 직원이 들어와 꼭 이 영화를 보셔야겠냐고, 극장에서 상영중인 다른 영화를 보시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영화들은 모두 이미 봤던 것들이었기에 환불해주면 나가겠다고 했더니 그건 또 안 된다며 그냥 틀어주겠다고 했다.

결국 영화 시작 전에 항상 나오던 광고도 없이 바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이미 봤던 다른 영화를 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영화의 재미는 차치하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영화들을 장르도 가리지 않고 모두 봤기 때문에 흔히 하기 힘든 번화가 한복판의 영화관을 전세 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책도 영화도 뭐 하나 끌리는 부분이 있다 싶으면 일단 봤고, 아주 가볍고 심플한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부터 분량이 많고 난해한 내용의 작품들까지 모두 당시의 기자에게는 훌륭한 도락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즐겁던 일들이 피곤해졌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와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그 책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몰입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글을 읽고 영상을 보지만 예전처럼 다양한 장르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찾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듯이 봐도 괜찮을 것들만 보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비단 기자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다들 복잡하고 긴 이야기는 피하고 짧고 명쾌한 것들만 찾는다고,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스킵을 하거나 배속을 높여서 보고 그나마도 피곤해서 요약 정리해 놓은 영상, 순식간에 끝나는 숏폼 같은 것만 본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온다. 조금만 답답한 상황이 나와도 고구마라 보기 싫다고 얼른 사이다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엄청나게 강한 먼치킨 주인공이 적들을 다 때려 부수는 이야기,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에게 빙의하거나 혹은 환생한 주인공이 이미 겪어봤기에 알고 있는 정보 등을 활용해 승승장구하는 고구마 없는 사이다 이야기들이 줄줄이 쏟아진다.

현실이 힘들고 팍팍하니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 현실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권선징악, 통쾌한 복수극, 거침없이 활약하는 주인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다가 가장 맛있을 때는 고구마나 삶은 달걀과 함께 먹을 때다. 게다가 고구마와 달걀은 건강에도 좋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르다. 잠시 가상의 세계에서 쉴 수는 있어도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어쩌면 현실에서는 자기 앞에 놓인 고구마와 삶은 달걀을 꼭꼭 잘 씹어서 다 먹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이다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수험생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아 힘들어하면서도 묵묵히 공부를 계속해 나가야 마침내 합격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현실에서 고구마를 피할 수 없다면 지금 눈앞에 놓인 고구마를 열심히 먹자. 그러고 난 후 먹게 될 사이다는 세상 그 무엇보다 시원하고 달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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