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인터뷰] IT에 능한 감성 법관-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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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인터뷰] IT에 능한 감성 법관-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김주미 기자
  • 승인 2018.05.11 18:2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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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6월호에 실릴 글입니다 ※

“30년을 법관으로서 치열하게 살아 온 강민구 판사는 법원 내에서 ‘강줌마’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로 주변을 섬세하고 살뜰히 챙기는 성품이다. 그는 냉철한 이성만을 사용해 사건과 사람을 재단하려 드는 법관이기보단, 풍부한 감성으로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까지 어루만지는 법관이었다.

지난 30년간 무수한 난제·미제사건을 미루지 않고 처리했기에, 때로 악의적인 재판 당사자들과 여론으로 포장된 공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는 분명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을 테지만 그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13년째 하동에서 직접 덖은 햅녹차를 부원들과 나누어 마시면서, 그는 오늘도 담담히 법대에 앉는다.”
 

▲ 사진 김주미 기자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그는 이제 엄연히 법조계 '혁신 아이콘'이다.
1988년 판사로 임관하여 법관 인생 30년을 걸어 온 서울고등법원 강민구 부장판사. 지난해 12월에 환갑을 맞은 그는 같은 날 선물처럼 그의 저서 <인생의 밀도>를 탈고하게 됐다. 옹골찬 나이테를 표지로 한 <인생의 밀도>는, 그의 혁신적 인생 철학과 발자취를 잘 정제된 언어로 풀어낸 수작(秀作)이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제2의 두뇌로 활용하는 어느 법관이 유튜브 강연으로 첨단 IT 기술을 직접 선보이자, 수많은 대중은 놀라면서 또한 열광했다. 그가 제작한 여러 개의 유튜브 강연들은 누적 조회수 185만을 기록, 강민구 판사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인생의 밀도>는 이 강연들의 해설서적 성격도 띠고 있다.

사투리 섞인 친근한 말투를 가진 그가 말했다. "꿈같지요. 꿈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우리 국민들이 디지털 시대에 다가올 변화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강연 영상들을) 만들어 올렸죠. 시청자들이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 책으로는 왜 안 나오냐는 문의들을 했죠."

그런데 이 책이 나온 과정 또한 범상치가 않다. 강 판사가 말했다. "에버노트(음성을 텍스트로 바꿔주는 기능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어플, 문서, 메모노트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니까, 보통의 집필 작업에 드는 노력의 3분의 1 정도 수고만으로 다섯 배에서 열 배의 생산성을 발휘할 수가 있어요."

기자에게 직접 보여주겠다며 에버노트 앱을 켠 그는 스마트폰을 턱 밑에 가져갔다. 하얗게 비어 있던 화면은, 곧 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글자들로 속속 채워져 갔다. 이 똑똑한 에버노트는 그가 한 말을 그대로, 거의 동시에 활자로 변환하여 화면에 송출하는 것이다.

강민구 판사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이렇게 바로 저장이 되니까 이것들을 이메일로 보내도 되고. 나는 이렇게 저장된 글이 1만 꼭지가 넘어요. 음성인식은 범용 모둘이라 문자자판만 나오는 앱에서는 다 쓸 수 있어요." 

로켓 개발자가 꿈이던 소년, 
컴퓨터를 만나기까지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9년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를 비롯한 모든 동네 사람이 모여 마을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흑백 TV 앞에 숨을 죽이고 앉았다. 강민구 판사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폴로 11호가 우주를 가로지르는 걸 온 면민이 다 같이 봤어요. 사람이 최초로 달에 간 역사적인 날이죠. 그때부터 저의 꿈이 로켓 개발자였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그는 어릴 때부터 시계나 라디오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로켓 개발자에 어울리는 면모를 곧잘 드러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공계 과목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찌어찌하다가' 법대에 진학하여 법관이 된 그는, 고스란히 내재해 있는 이과 적성 때문인지 '법조계의 스티브 잡스'라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하늘마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걸까. 그는 군부대가 아닌 육군사관학교 교수부로 발령이 나 군복무를 했는데, 강 판사는 그것을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다.

"더미터미널이라고, '멍텅구리 컴퓨터'라고도 하지요. 화면하고 키보드만 있는 단말기인데, 거기서 그걸 봤어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본 그 컴퓨터가 너무 신기한 거예요. 3년 있으면서 파스칼, 포트란 같은 코딩 언어를 공부하고, 모르는 건 전산 장교한테 물어보며 배웠죠. 육사로 발령받은 게 지금 생각해도 큰 행운입니다." 

1988년에 전역하면서, 그는 당시 중고 자동차 한 대 값에 맞먹던 컴퓨터 한 대를 과감하게 샀다. 그런데 그가 근무하던 의정부 지원에서는 얼마 안 있어 18명의 판사들이 그를 따라 컴퓨터를 구매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박시환 전 대법관, 이진성 헌법재판소장도 강 판사를 따라 컴퓨터를 구매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강 판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호프만식 계산법을 따르기 때문에 공무원들 손해배상금을 산출할 때 호봉을 반영합니다. 근데 그땐 엑셀이 없으니까 일일이 판사들이 손으로 계산했습니다. 판사가 계산하고, (법원) 직원이 계산하고, 아내까지 계산해 보고, 이 계산한 값이 다 똑같아야 판결이 나오니까 판사들이 아주 고생을 했어요. 이 계산만 해도 일주일이 걸렸죠. 그런데 컴퓨터를 가진 저는 이걸 뚝딱 30분 만에 한단 말예요. 그걸 본 18명의 법관들이 다 저를 따라 컴퓨터를 샀죠(웃음)." 
 

▲ 사진 김주미 기자

그가 기반 다진 한국의 전자법정  

현재 우리나라 전자소송 이용률은 행정소송의 경우 100퍼센트에 가깝고 민사는 60퍼센트를 넘어섰다. 형사 또한 약식사건 가운데 일부가 전자화됐다. 이처럼 한국의 사법정보화 수준이 사실상 '세계 1등'의 경지에까지 올라 있는 것은 일찍부터 우리 법원이 가야할 길이 '전자법정'이라 믿고 노력한 강민구 판사의 공로가 크다.

1990년대 중반, 이미 그는 법원 내 '컴퓨터 전문가'로 이름이 난 상태였다. 강 판사는 천리안 PC 통신 법관 동아리인 '주리스트(Jurist)'에 소속, 컴퓨터에 조예가 깊은 여러 법관들과 교류하며 IT를 사법행정에 접목하는 구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1998년 9월 개통돼 훗날 전자법정의 초석이 된 한국 초유의 본격적인 클라이언트 서버(C/S) 기반 법률정보 DB '종합법률정보 1.0'은, 그의 절대적인 기여가 성공을 견인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국민들이 이걸 잘 몰라요. 강연을 나가면 국민들께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앱(App)부터 소개합니다. 나홀로 소송할 때 이것만큼 좋은 게 어딨어요. 관련 판례와 법령을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법률정보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춘 의미가 있는데 언론이 잘 안 다뤄줍니다."

한편 강 판사는 중요한 경험 하나를 더 소개했다. 1999년에 미국 국립주법원행정센터(NCSC)로 사법정보화 과정 연수를 가게 된 게 또 하나의 큰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화상재판, 전자법정, 전자파일링 등 시대상황상 '혁신'으로 분류되는 주제들을 고민하던 그는, 때마침 얻은 미국 연수 기회를 통해 선진 시스템을 익힐 수 있었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이걸 정리하고 싶었어요. 문익점이 된 기분이었죠. 2000년도에 귀국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250쪽 분량 보고서와 650MB의 자료집 CD를 묶어 대법원에 보고했어요. 그 보고서에 원격영상재판과 자동번역 프로그램, 음악법정 등 이후 제가 법정에 도입한 각종 실험들이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덕에 2003년, 그는 '한국사법부의 전자법정과 전자소송의 기초 설계도'라고 평가받는 단행본 <함께하는 법정>을 출간할 수 있었다. <함께하는 법정>이 신간 <인생의 밀도>의 중요한 선행기록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가 꿈꾸는 법정- 
가슴이 따뜻한, 감성 있는 법정  

예술 법정이 필요하다는 데 대한 그의 견해는 확고했다. 법원의 합리적인 업무 처리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국민의 마음을 다독이는 '감성 있는 법정'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법정에 창문이 하나 없어요. 삭막한 법원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쭈뼛거리면서 들어오는 시민, 억울함과 스트레스로 잔뜩 어두워져 있는 당사자들의 안색 등이 곧 법원의 이미지예요. 그런 법원을 생각하면 참 답답했지요. 예술이 사람 감성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요. 벽면에 미술품이 걸려 있고, 곳곳에 예술품이 놓여 있고, 오전 재판 시작 전 음악이 잔잔히 흘러서 장내를 저절로 정리하는, 법정이 그렇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법정'으로 국민들께 다가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강 판사는 초임 법관 시절부터 바람직한 재판 못지않게 바람직한 법정의 구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의 겸손한 표현에 따르면 ‘여느 법관이 그렇듯’ 그 또한 법정의 모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다는 설명이다. ‘왜 선진국에 속하는 나라의 사법부에서는 법정을 굳이 사진과 그림으로 장식하고 음악을 들려주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던 강 판사에게, 그 필요성을 절감토록 한 계기가 있었다며 일화를 전했다.

“2001년 대구지방법원에 있던 시절, 수년간 쌓인 가족 간 감정이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진 사건이 있었지요. 가족 사이에 엉킨 실타래를 도무지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민사 조정을 진행해야 했어요.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가만히 음악을 틀었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노래한 <회심곡>이었는데, 도무지 감정의 골이 풀릴 것 같지 않던 양 측 모두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더니 금세 조정안에 합의를 했습니다. 함께 법원을 나가는 이 모자의 뒷모습은 아직까지도 제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2014년 창원법원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갤러리와 흡사한 모습으로 변신한 법정의 모습을 대중에 공개해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가 가장 먼저 변화시킨 곳은 소년법정 대기실. 삭막한 쇠창살을 없애 휴게실과 같은 분위기를 낸 뒤, 화사한 꽃과 백로 사진 작품을 내걸었다. “(소년범들이) 백로처럼 하얗게, 또 꽃과 같이 다시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라고 그가 말했다.

30년을 법관으로서 치열하게 살아 온 강민구 판사는 법원 내에서 ‘강줌마’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로 주변을 섬세하고 살뜰히 챙기는 성품이다. 그는 냉철한 이성만을 사용해 사건과 사람을 재단하려 드는 법관이기보단, 풍부한 감성으로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까지 어루만지는 법관이었다.

지난 30년간 무수한 난제·미제사건을 미루지 않고 처리했기에, 때로 악의적인 재판 당사자들과 여론으로 포장된 공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는 분명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을 테지만 그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13년째 하동에서 직접 덖은 햅녹차를 부원들과 나누어 마시면서, 그는 오늘도 담담히 법대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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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2018-11-05 13:09:41
ㅋㅋ 이분이구나 얼굴이 궁금했는데 ㅋ

오잉 2018-06-13 02:21:32
유튜부의 강의 내용 좋더군요 장충기에게 보내셨던 문자도 잘 보았습니다

맞아요^^ 2018-05-13 03:16:00
예술이 사람 감성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요ㅋㅋ
좀더 많이 대중화되고 좀더 가까이 문화생활과 예술이 많은 사람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면 좋을것같아요ㅋㅋ프랑스는 길거리에도 예술가가 넘친다던데 우리도 이제 저성장시대에 접어들었으니, 정신적측면에서 삶을 질을 높여줄 하나의 도구로서 예술이 많이 활용되었으면 좋겠어요.

의문이야 2018-05-12 19:04:22
본인을 IT 전도사로 끊임없이 포장하는 거 다 좋은데, 현직 법관이 삼성 장충기 사장에게 문자는 왜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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