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제법 전문가 권오곤 前 ICTY 재판관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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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제법 전문가 권오곤 前 ICTY 재판관을 만나다
  • 김주미 기자
  • 승인 2016.10.12 1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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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목 받는 판결을 내린 것 인생의 큰 감사와 행복”
“국제사회에서 한국 법과 법률가는 높은 위상 가지고 있어”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발칸 반도는 고대부터 세계 패권을 꿈꾸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온 곳이다.

이러한 발칸반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연방)이 수립된다.

이 구 유고연방은 초대 대통령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죽은 뒤 잠재된 민족 갈등이 악화돼 서로간 분리 독립의 길을 걸으며 분열과 내전을 거듭하는데, 이 과정에서 내전 4년 만에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구 400만 중 40%가 난민이 되는 등 집단학살을 비롯한 여러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된다.

1993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비상권한’에 근거, 1991년 1월 1일 이후 구유고슬라비아 영토 내에서 발생한 대량학살과 반인륜적 범죄 등에 책임 있는 개인을 형사소추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구 유고슬로비아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약칭 ICTY)’를 창설했다.

이러한 ICTY에 한국인 최초로 재판관으로 선출돼 부소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15년 동안 국제재판관을 지낸 권오곤 소장을 법률저널이 만났다.

역사적·국제적으로 의의가 큰 다수의 판결을 맡아 국제사회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인류와 국제사회를 위해 매일 재판하는 것이 큰 보람이었다”고 말한다.

15년간의 ICTY 근무를 마치고 지난 4월 귀국해 현재는 김앤장 국제법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있다.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기자들을 맞이한 권오곤 소장은, 특유의 격의없는 친근함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왔다.
 

▲ 권오곤 소장을 11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 사진 강미정 기자

‘수석 3관왕’

서울대 법학과 수석 졸업, 제19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 연수원까지 수석 수료한 그는 이른바 ‘수석 3관왕’이다.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돼 대통령 비서실 법제연구관, 법원행정처 기획담당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헌법재판소 연구부장 등의 국내 사법기관을 두루 거쳤고, 지난 2009년에는 대법관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다.

대한민국 판사들이라면 ‘대법관’이 되는 것을 한번쯤은 꿈꾸지 않을까. 최종적으로 대법관에 임명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는지를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대법관 자리가 국제재판관으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사건들을 맡아 재판장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선고한 그 경험과 맞바꿀 정도는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물론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렇죠.”

수석 3관왕의 어마한 꼬리표가 붙은 그는 혹시 ‘공부의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어 비법을 물었더니, 멋쩍은 미소로 그가 말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반에서 1등 한 번 못 해봤어요. 딱 반 2등 해 봤죠.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은 제가 처음 1등해 본 겁니다.(웃음)”

사법시험 수석은 두 번의 낙방 뒤 벼랑 끝이라는 기분으로 이를 악물고 매달린 덕에 얻어진 결실이었다고 한다.

연수원 시절 때는 야간 방위를 하던 터라 이틀에 한번씩 밤을 새우게 됐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 법원공보에 실리는 판례마다 카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주효했다는 설명이다.

당시엔 지금처럼 정리된 판례집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하나하나 작성한 권소장만의 판례카드는 그를 연수원 수석 수료자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듣고 보니 단순한 열심과 의지만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법을 좋아한 것이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처음 대학을 진학할 땐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의 권유로 법대를 진학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법이란 것이 결국은 사람 이야기더라구요. 가족법만 해도 ‘사랑과 미움과 돈의 법’ 아니겠습니까. 전쟁법은 더 흥미롭죠. 등장인물이 아주 많아요. 정치지도자, 사령관, 일반군인, 민간인 등. 그들의 입장과 관계, 권리 등을 함께 생각해주고 찾아주는 것이 법입니다. 법은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게 하면서 사람간의 공감과 긍휼의 도구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법을 좋아하게 됐어요”

“국제법분야 진출을 꿈꾸는 청년변호사들에게”

최근 변호사업계는 늘어나는 변호사 배출 수에 비해 시장이 그만큼 확대되지 않아 청년변호사들의 활로 개척에 온 업계가 사활을 걸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 대한변협 주최로 열린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서는 한 발표자가 권오곤 소장의 예를 들며 청년변호사들에게 국제법 분야의 진출을 장려하기도 했다.

권소장 역시 이러한 변호사 업계의 어려움에 문제의식을 같이 했다.

“과거에는 변호사 수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다른 자격사들이 변호사의 업무를 대신하게 해줬지 않나요. 이제는 변호사 수가 충분하죠. 원래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은 변호사가 하는 것이 맞습니다.”

권소장은 한편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사회의 인식 또한 변화돼야 함을 지적했다.

“변호사가 어떤 엄청난 기득권이 아니에요. 그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죠. 사회 곳곳에, 저변에 변호사들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모여 대한민국의 법조사회를 이루는 것이니까요.”

국제법 분야 진출을 고민하는 변호사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예전에 어느 기업가가 그랬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국제법 분야만 해도 국제공법, 국제형사법, 국제사법, 국제거래법, 지적재산권법 등 이루 다 헤아리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나라도 세계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법조의 국제화 또한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국제화 시대에서 한국에 기여할 만한 전문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 이 국제법 분야의 매력입니다. 각국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모여든 젊은이들을 볼 때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국제법 분야로의 진출을 꿈꾸는 사람이 특히 키워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먼저는 영어죠. 물론 영어가 필수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발음이나 문법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의사표현의 문제이므로 컨텐츠를 신경써야 합니다. 저 역시 처음에 나가서는 영어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영어가 유창하지 않으니까 말을 적게 하거나 또는 안했죠. 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이들이 내 영어실력을 기대해서 날 부른 것이 아니라 한국의 법적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부른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그런 확신이 들고 나니 영어에 대한 어려움이 극복되더군요. 국제법 분야 진출을 위해서는 영어가 물론 필수이지만 영어 자체가 목표는 아니고, 내가 가진 컨텐츠를 잘 표현해 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어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실제 한국에서 온 청년들이 국제법 분야에서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일까.

“역시 언어적 문제입니다. 문화 차이나 관계의 문제는 사적인 것이니 제외하고 업무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우선 한국에서 법적 지식을 쌓아온 청년들이 세계 어느 나라 청년들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법과 법률가는 그 위상이 이미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구요. 우리 법학 교육은 아주 잘 되어 있고 한국 학생들의 법학 논리나 법적 소양은 우수하지요. 그런 훌륭한 컨텐츠를 담아 낼 언어적인 문제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청년들이 가장 많이 토로하는 어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권소장은 한편 “아직 한국이 청년들의 국제법 분야 진출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시스템을 잘 갖추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현실적으로 국제기구에서 사람을 뽑을 때 가까운 사람을 뽑는 경향이 있어요. 눈에 보였던, 알던 사람을 뽑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국제기구로의 첫 진입은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임시직이나 인턴 형식으로 먼저 근무해 보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인턴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매우 적은 상황이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김현 변호사가 서울변호사회 회장인 시절 제가 거기 연계해 지원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장학단체에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도 하는데요, 국제기구 진출을 위한 인턴 등 자리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 사진 강미정 기자

37년간 걸어온 법관 인생

그는 그가 걸어온 재판관의 길을 무어라 표현할까.

“판사라는 사람은 듣고 결론을 내려주는 사람입니다. 양쪽 이야기를 다 듣고 입장들을 생각해 주고 법에 따라 결론을 내리죠. 좋아하는 법을 공부하며 좋아하는 일을 37년간이나 해온 것에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그 중 특히 황금기인 48세부터 63세까지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재판에 참가했죠. 보람과 감사를 느낍니다”

국내와 국외 재판관의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에게 양자 비교를 청했더니 그의 첫마디는 “한국 판사가 더 바쁘다”였다.

“한국 재판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신속히 결정이 내려집니다. 사건을 더 많이 다루고 그만큼 판사들이 바쁘죠. 반면 ICTY에서는 한 건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한 사건은 증인만 600명이었고 판결은 2,600페이지에 달했죠. 물론 그 경우에도 판사가 힘들기는 매한가지지만 보람은 더 있다고 봐요. 판단은 모든 것이 충분히 고려된 후에야 내려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주장과 법률주장이 최대한 반영돼야 정확한 판결이 나올 것이고 그래야 당사자가 수긍하는 적법절차의 준수가 됩니다.”
그는 또 판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언급했다.

“한국은 재판을 막 마친 재판관이 법복을 입고 구내식당 가서 줄 서 있으면 이리 오시라 먼저 가시라 당겨 주거나 밀어 주거나 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네덜란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가 비서 뒤에 서 있어도 먼저 줄 선 사람이 먼저 주문합니다. 참 평등한 사회라고 느꼈는데 거기서 더 자유롭게 되더군요. 그런 점은 한국보다 훨씬 편안했어요. 쉽게 말해 한국은 판사가 일상 생활에서 ‘나는 판사다’라고 의식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는 반면 네덜란드는 판사도 일상 생활에서는 ‘나는 시민이다’라고 의식하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거죠.”

“국제형사재판 경험 강단에서 전할 수 있을 것”

한편 권소장은 서울의 한 사립 로스쿨에서 이번 학기부터 국제형사법 강의를 맡기로 예정돼 있었다.
‘초빙 석좌교수’의 자격으로 강좌를 맡아 시간표도 확정하고 수강신청까지 받은 상태였던 그는, 대한변호사협회의 평가위원회가 정한 ‘강의적합성’ 항목에서 불충족으로 평가돼 갑작스레 학교로부터 강의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권소장은 대한변협 평가위원회의 기준에 대한 불합리성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자신의 SNS에 토로했었는데, 한 언론이 그것을 확인하고 기사화하는 바람에 그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게 된 것.

권소장은 그 일에 대해 “새삼 SNS의 위력을 느꼈고, 상당한 당혹감을 느꼈다”며 “다만 그러한 경직된 평가 시스템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는 분명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전했다.

권소장은 “앞으로 논문을 제가 더 쓸 수도 있는 것이고, 변협의 평가기준이 합리적으로 개선될 수도 있는 것이니, 가까운 시일 내 강단에 설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며,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강의의 형태로 나누고자 하는 의향을 전했다.

실제 지금도 권소장은 곳곳에서 국제법 특강을 하고 있다.

얼마 전 한 특강에서는 “북한의 지금 인권탄압 상황이 심각해 국제법상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할 수 있지만, 당장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해봤자 큰 실익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요건에 맞게 증거를 잘 모아두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국제사회의 그러한 준비 작업 자체가 북한에는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그 외 국제법적인 논의들을 특강을 통해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언론에는 마치 권소장이 당장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잘못 보도돼 상당히 곤란했다는 당시 심경을 전하기도 했다.
 

▲ 권오곤 소장이 진열된 사진들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권소장이 들고 있는 사진은 ICTY 구성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그 중에는 당시 ICTY 연구관으로 있던 조지 클루니의 배우자 아말 알라무딘(변호사)의 모습도 있었다. / 사진 강미정 기자

하루하루 치열하게 자신의 길을 고민하며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청년들에 대한 조언과 격려를 그에게 청해봤다.

“인생은 참으로 오묘해서 내일 일을 오늘 알 수는 없지요. 매 순간 열심히 노력하고 열린 마음으로 꾸준히 준비하다보면 그런 사람에게 이런저런 기회는 오기 마련이고, 준비가 돼 있어야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판사를 지원한 제가 그렇게 외국에 나가게 되리라고 누가 짐작을 했겠습니까.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법은 인간의 여러 가지 면을 다루고 있기에 그만큼 다양한 분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전문분야를 찾는 것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경제적 가치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 너무 그에 좌우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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