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알베르 까뮈의 페스트, 대한민국의 메르스,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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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알베르 까뮈의 페스트, 대한민국의 메르스, 실존
  • 오시영
  • 승인 2015.06.26 11: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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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50여 년 전, 1960년대 초에는 책이 참 귀했다. 초등학교 5학년 경부터 책 읽기에 눈이 열리고 귀가 뚫렸던 필자는 친한 친구나 선배 집에 어떤 책이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그 책을 빌려 읽었었다. 중학생이 되어 책읽기에 깊이 빠져들어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으로 소설책을 펴놓고 읽다가 교무실에 끌려가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수업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수업시간에 소설책만 읽어대는 수업태도불량학생이 되어 예쁜 처녀선생님 속을 썩이다가 급기야는 그 선생님을 울리기까지 하고 말았던 기억도 새롭다. 그 대가는 그 여선생님을 흠모했던 총각 남자선생님에게 등짝을 세게 두들겨 맞는 아픈 통증이었다. 그래도 책읽기 삼매경은 어쩔 수 없어, 급기야는 소설책을 선생님께 뺏긴 적도 있고,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여 선생님께서 퇴근하신 후 몰래 교무실에 숨어들어가 압수된 그 책을 훔쳐 내오기도 했었다. 빌린 책이어서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다음날 선생님께는 책 돌려달란 말씀을 안 드렸다. 선생님 혼자 내가 찾아간 줄도 모르고 혼자 끙끙(?)하고 고민 좀 하셨겠지(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용도 잘 모르고 이해도 잘 되지 않는 세계문학소설을 읽고 또 읽었으니, 위에서 아래로 내려쓴 아주 작은 글자체, 활자도 좋지 않고, 인쇄도 좋지 않고, 종이의 질도 좋지 않았던 그런 책들을, 오직 내용이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읽고 또 읽으면서 감동하고 또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당시 필자를 비롯해 친구들이 즐겨 읽었던 책이 까뮈의 이방인과 페스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데미안, 더 나아가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이방인을 통해 햇살의 강렬함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주인공의 독백도 귀담아 들었고, 페스트를 통해 쥐가 퍼트리는 전염병 앞에 인간의 속수무책과 절망을 깨닫기도 했고, 데미안을 통해 알은 세계다, 새는 알에서 깨어난다, 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자는 다른 한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등의 글귀를 알듯하면서도 모르겠고, 모를듯하면서도 알 것 같은 지적 사치에 사로잡혔던 기억도 새롭다. 사춘기 문학청소년시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진찰실을 나오던 의사 리유는 계단에 쥐가 죽어 있는 모습을 처음 발견하고, “여기는 쥐가 나올 만한 곳이 아닌데...”라며 죽은 쥐를 치우라고 지시한다. 그렇지만 저녁 무렵에도 또 다시 리유를 향해 달려오다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쥐를 보며 리유는 놀란다. 그 뒤로 도시에서 수많은 쥐들이 죽어나가고, 페스트가 창궐하며 사람이 죽어 나간다. 오랑 시는 결국 폐쇄되기에 이르고, 사람들은 독안의 쥐가 되고 만다. 마치 자가격리자가 7천명에 이른 메르스사태처럼. 격리의 세상이 되고 만다. 쥐로 시작된 페스트로 인해 사람들이 독안에 갇힌 쥐꼴이 되어 버리는 페스트, 그래서 보건당국은 학생들더러 쥐를 잡아 쥐꼬리를 잘라 가지고 학교로 가지고 오라 했었는지도 모른다. 쥐덫을 놓고, 쥐약을 뿌리고, 오직 페스트균으로부터 살아남겠다며, 아니 그때 당시는 쥐가 먹어치우는 곡식의 양이 너무 많다며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쥐가 먹어 치우는 게 너무 많으니 쥐를 잡자고 설명하시던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독안에 갇힌 생쥐가 되고서야 인간은 실존을 생각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ecede Eessence.).”고 주장하는 실존주의는 관념이 앞선다고 보았던 합리주의에 맞서 실존이 관념, 즉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존재하여야만 관념, 즉 본질을 논할 수 있는 것이지, 관념에 의해 실존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47년, 34살의 나이에 까뮈는 소설 페스트를 썼고, “사형에 관한 성찰”로 마흔 네 살이던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그로부터 3년 뒤 마흔 일곱에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사회는 전쟁의 황폐함과 인간 신뢰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갈등과 고통을 겪고 있었고, 당시 34살의 저널리스트였던 까뮈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 페스트를 통해 전쟁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페스트라는 전염병을 통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폭로하였다. 

페스트 속에는 의사, 공무원, 저널리스트, 죄수, 종교인 등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페스트라는 질병 앞에 인간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출한다. 의사 리유처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헌신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수백 마리의 쥐가 이상한 증상을 보이며 떼죽음을 당하며 죽어나가는 현상을 보고서도 오직 수거하여 소각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낙관하다가 페스트를 초기진압하지 못한 무능한 공무원들도 있다. 그러한 시당국의 안이한 대처에 분노하며 항의하는 리유로 인해 시당국은 페스트로 확정을 지을 수는 없다면서도 방역대책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마치 초기 대한민국 방역당국의 현상을 본 듯하다. 삼성병원의 병원이름 감추기 형태를 보면 삼성병원에 과연 리유 같은 양심 있는 의사가 있었는지 의문이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긴급대책수립발표를 오히려 정치공작이라 선동하며 못 마땅해 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더 더욱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0년 전 페스트의 오랑 시를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이 바로 대한민국 현주소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페스트로 고통 중에 죽어나가는 데도 오직 신의 저주에 의한 전염병 창궐이라 주장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면 낫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하는 신부 파눌루 역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마는 사실을 통해 현실을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 대해 통렬한 야유를 보낸다. 인간 실존이 신에 앞선다고 보았던 까뮈는 페스트를 일으키는 것이 쥐새끼이듯,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새끼이고, 이 인간새끼들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인간 실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땅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어쩌면 파눌루 신부만도 못한 것이 아닐까? 세속의 금욕과 권력에 사로잡혀 신의 뜻을 저버린 채 세상욕망과 권세에 눈이 뒤집혀 있어 희생과 봉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사는 종교지도자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파눌루 신부는 물론 페스트로 죽고 만다는 점 앞에서는 무력한 종교지도자였지만, 끝까지 병든 자 옆에서 기도하고 헌신하며 그들을 살려 달라며 기도했던 점에서는 오히려 존경할 만한 종교지도자였다고 해도, 오늘날 세속적 종교지도자들보다 훨씬 훌륭한 신앙인이었는지 모르겠다.

인구 20만의 오랑 시, 단순 여행객이었던 노인 타루는 자칭 바람둥이로 세상을 흥청망청 살아왔지만 마지막 순간 시가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자경보건대를 조직한 후 의사 리유를 도와 페스트 퇴치에 앞장서다가 결국 의롭게 죽어간다. 다들 도망가기에 바쁜 주민들과 대비되며 우리로 하여금 실존과 본질을 생각게 한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페스트를 품고 있다면서. 이처럼 남의 일에 헌신적으로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 타루처럼,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환자를 수송하고, 치료하고, 돕다가 메르스에 전염된 의인도 속출하였다. 랑베르 기자, 여행객이어서 오랑 시의 페스트와는 상관없다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야겠다며 밀수업자의 도움으로 도시탈출을 시도하다가 마지막 마음을 돌려 저널리스트로서의 사명을 깨닫고 되돌아와 올바른 정보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성안에 남아 있던 랑베르 기자는 살아남지만, 성 밖에 있던 약혼녀는 오히려 병에 걸려 죽는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실존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느냐 죽었느냐라는 결과로 판가름 난다는 철저한 실존을 인식케 한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둘러싸고, 메르스퇴치라는 본질을 가리는 얼마나 많은 비논리적 억지주장이 종편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에 진실한 랑베르 기자는 있기 마련이다. 사이비기자가 아닌 진정한 기자 말이다. 어쩌면 기자의 본분을 망각한 채 남의 기사 베끼기에 여념이 없고, 힘쓰고 애쓰는 자에 대한 칭찬과 격려 보다는 오로지 정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러한 우직한 행보를 걷는 이들을 향해 모략과 중상을 일삼는 언론이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페스트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재판을 받던 죄수 코타르는 페스트로 인해 석방되어 혼란의 와중에서 마약, 술, 담배 등을 밀수밀매하며 치안공황상태를 즐기다가 결국 페스트가 잡히고 질서가 회복되자 질서 속의 형벌을 두려워하다가 총을 난사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어쩌면 마스크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환자 치료를 포기하는 의사가 나타나는 세태에 대한 반증이다. 까뮈는 말한다. 결국 페스트는 잡혔다고, 그래서 살아남은 자는 실존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모두 페스트균이 도사리고 있다고, 언제 어떻게 페스트균이 또 다시 집단발병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모두 조심하라고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도 페스트 전염상태이다. 가장 무서운 페스트, 빚과 실업과 절망의 페스트가 만연되어 있다. 국가부채가 1200조를 뛰어넘고, 가계부채가 1100조를 뛰어 넘었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다. 5580원의 최저시급 인상을 둘러싸고 재계와 노동계가 힘겨룸 중이다. 동결하자는 후안무치한 재계위원들이 있다. 그대로 동결하잔다. 1만 원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은 정부의 공익위원들이 거들지 않는 한 무력하다. 결국 공익위원들, 다시 말해 정부의 입장이 제일 중요하다.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은 페스트,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사회질병이다. 이건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치유가 도저히 불가능한 국가질병이다. 저렇게 열악한 최저임금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인간 실존을 실종케 하는 사회범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재계의 탐욕이 조금 적어지고, 양보와 희생정신이 조금만 더 생겨나고, 이러다 메르스처럼, 페스트처럼 우리 모두 함께 공멸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자아성찰, 실존에의 철학적 인식이 생겨나야만, 합리적으로 최저임금이 인상되어 인간으로서의, 문화인으로서의 시민생활이 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자는 다른 한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말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알베르 까뮈는 페스트에서 말한다.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행복을 찾으려 했던 랑베르 기자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페스트로 잃고, 까뮈는 마흔 일곱의 젊은 나이로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 없던 듯 굴러간다. 하지만 죄수 코타르가 혼란 속에서 향락을 누리고 잘 사는 것 같지만, 결국 총을 난사해 자신이 죽고 만다는 것, 그것은 모두가 명심해야 한다. 남의 것을 착취하고 빼앗고, 불의를 저지르며 남에게 해악을 가하면 그는 반드시 죽는다. 그게 실존이다. 메르스가 우리 마음에 남기고 간 상처, “아, 대한민국의 현실, 대한민국의 한계는 여기까지 이구나”. 그렇다면 내일은 달라질까? 독자님, 당신은 무엇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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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글이 2016-03-23 23:14:50
잘 읽고 갑니다.
그런데 랑베르의 애인은 죽지 않아요. 시의 출입문이 다시 열린 날 기차를 타고 와서 만나요.
보고 싶어 하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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