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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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일
  • 법률저널
  • 승인 2013.11.2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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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아이는 어느덧 돌이 되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날들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갑작스럽고, 낯설고, 벅찬 경험이다. 아이는 온몸으로 낯선 세상을 익혀가는 중이다. 쏟아지는 햇살에 손을 뻗기도 하고,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이제 아이는 조금씩 말을 배워 나가고 있다. 새삼 아이를 보면서, 세상 온갖 것들에 우리가 붙인 ‘이름’이 있음을 깨닫는다.

요즘 들어 아이는 수박을 보면서 ‘슈-박’이라 하고, ‘코!’라 하면 내 코를 가리킨다. 아이가 ‘수박’과 ‘코’를 아는구나 싶어 내심 기특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는 배나 바나나를 보고도 ‘슈-박’이라 했고 ‘입!’이라 외쳐도 똑같이 내 코를 가리켰다. 아이의 ‘슈-박’은 내가 부르는 ‘수박’보다 더 큰 무엇이었고, 아이의 ‘코!’는 내가 생각했던 ‘코!’와 다른 무엇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가 ‘슈-박’이라 말하고 ‘코’를 가리킨다 하여 내가 부르는 ‘수박’과 ‘코’를 알겠거니 한 것은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다. 사실 우리는 아이 모르게 이미 세상 온갖 것에 ‘이름’이라는 것을 붙여 놓았고, 아이는 이제 겨우 그 낯선 것들을 만나 하나하나 더듬어 가며 배워나가는 것이다. 단어장을 펴 놓고 그 뜻부터 배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립식’과 ‘졸업식’이 유난히 헷갈렸던 나도 그렇게 하나씩 말을 배워왔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쓰는 이름 하나하나에는 사전, 역사라고 붙여도 좋을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렇게 이름은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가진 무엇이 되어 간다.

사실 ‘재판’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이름’을 불러주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권리’가 있고 없고, ‘죄’가 있고 없고를 선언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요건’들을 인정하는 것 모두가 그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다. 결국 재판의 결론은 ‘법’을 선언하는 것, 법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된다.

그런데 권리나 범죄 같은 것들을 법이 미리 정하고 있음에도, 그 이름을 붙여나가는 일은 공식풀이처럼 선명하지 않다. 다툼이 생기는 지점이 ‘사실이냐 아니냐’인 경우도 많지만, 같은 ‘이름’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거나 비슷한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서 다투는 경우도 흔하다. 마치 아이의 ‘슈-박’과 나의 ‘수박’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또 ‘법대로 해달라’고 말한다. 법적용이 일상인 법관들의 ‘법’과 그렇지 않은 당사자들의 ‘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당사자들의 법은 그들의 일상이 투영된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가진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다시 변주된다. 그들 각자 생각하는 법은 당위(當爲)로서 막연한 정의관념이나 권리의식일 수도 있고, 현실로서 마지막 보루, 차가운 벽, 잘 계산된 수단, 답답한 원칙일 수 있다.

당사자들의 ‘법’은 그 삶과 처한 입장만큼이나 스펙트럼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관이 선언하는 ‘법’과 당사자들의 ‘법’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법관이 잘 재판하려 노력했다고 그만큼 당사자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정받고 알아달라고 재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법관과 당사자의 법이 꼭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법관은 당사자들이 무엇을 법이라 부르는지, 왜 그렇게 부르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법이 규율해야 하는 현실이고, 그 현실에 우리가 법적 사실, 요건이라 부르는 것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재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법관이 타인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타인이 부르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른바 소통과 경청이 화두가 되고, 사람과 세상이 공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노력이 불필요한 오해로 잘못되지 않도록 법정언행도 강조된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덤으로 법원에 대한 신뢰가 쌓일 수만 있다면, 어쩌면 인정받고 알아주는 재판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아주던 그렇지 않든 간에, 당사자들이 붙여온 이름과 그 이름의 유래를 더듬어 보는 것은, 법관이 개별 사건에 걸맞은 빛깔과 향기를 지닌 ‘법’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그저 묵묵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이것이 내 아이처럼 그렇게 하나씩 이름을 쌓아왔을 이들, 자신의 목소리가 법원에 어떻게 닿을지 알 수 없어 불안한 이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다. 참으로 막막한 작업이 되겠지만, 그래서 어느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끝내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가 되고 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더듬다 보면 몸짓이 스며 작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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