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박근혜 후보의 10ㆍ26에 멈취버린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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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박근혜 후보의 10ㆍ26에 멈취버린 시계
  • 법률저널
  • 승인 2012.09.2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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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박근혜의 시계는 1979년 10월 26일에 멈춰 서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된 시각에 그녀의 사고가 정지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최근 5ㆍ16쿠데타와 유신헌법에 대한 그녀의 입장표명 및 인혁당 사법살인사건에 대한 그녀의 언행 때문이다. 그녀는 5ㆍ16쿠데타에 대해 “그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북한이 남침하면 국가안보가 무너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국가존립자체가 무너지게 되어 국가안보를 확립하여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5ㆍ16쿠데타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에는 엄청난 모순이 전제되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북한의 침략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그녀의 가정이 허구라는 점이다. 민주주의헌법질서유린행위인 5ㆍ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당시 북한은 구체적으로 남한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려고 하여 5ㆍ16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전제”를 전제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어 논리의 오류인 것이다. 당시 북한은 6ㆍ25전쟁에서 패한 후 북한체제의 유지를 위해 정신이 없던 때였고, 6ㆍ25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남한과 미국은 한미군사공조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재차 침범한다는 것은 그때 당시 불가능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남한침략위험상황존재라는 거짓 전제에 근거하여 계속 5ㆍ16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하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이는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에 자신의 대통령 3선 연임을 위한 헌법개정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헌법교과서에는 그의 1969년 개헌을 “일명 3선개헌”이라고 명명하여 설명하고 있다. 종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가 4년 연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헌법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5ㆍ16쿠데타 후 자신이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 만든 헌법이었다. 자기가 만든 헌법을 스스로 부정하며 자신의 3선을 보장하기 위해 위와 같이 헌법을 개정한 후 1971년 4월27일 실시된 제8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와의 선거에서 약 94만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하였음이 공공연히 주장되었으니, 그것은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이 진 선거를 부정선거를 통해 역전시켰다는 것이었다. 40년 전 대한민국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공공연히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수 있는 사회적 구조였기 때문에 대통령부정선거 역시 “막걸리선거, 고무신선거”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기도 하였었음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2월 27일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10월유신이라는 이름이 회자되었으니, 이는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무력으로 헌법에도 없는 “국회해산권”을 행사하여 국회를 해산한 후 유신헌법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스무 살이 되어 최초로 투표권을 획득하여 한 첫 번째 투표가 유신헌법찬반투표였으니, 첫 번째 투표에서 반대투표를 던졌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의해 두 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유신헌법의 주요내용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대통령선거인단을 조직한 후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면서 중임제한규정을 삭제하여 자신의 영구집권의 길을 연 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거수기단체를 통해 99.9% 득표율이라는 공산주의국가에서도 나오지 않는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시되는 통계표에는 득표율을 반올림하여 100%로 표시한 통계자료도 있으니, 100%득표라는 “하나마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두 번이나 당선되면서, 북한을 향해서는 공산당일당독재국가로 100%득표율로 당선되는 김일성 주석을 향해 독재자라고 정치공세를 퍼붓고 있었으니, 지금 되돌아보면 낯 뜨거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8년 집권기간 동안 다섯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5ㆍ16쿠데타 후 5대와 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3선개헌을 강행하여 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7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다시 유신헌법을 만들어 8대와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9대 대통령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었다. 다섯 번의 대통령 임기 중 한 번은 스스로 임기를 단축하고, 다른 한 번은 김재규에 의해 단축되었다. 세 번은 무사히 마쳤지만 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라는 문명국가치고, 한 사람이 다섯 번 대통령을 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이 지구상 유일한 국가이지 않을까? 박근혜 후보는 유신헌법과 관련하여 자신의 부친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번영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유신체제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며, 유신체제가 불가피했다며, 유신의 비판자들을 향해 자신의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라고까지 말했다며, 아버지의 구국충정의 진정성을 알아줘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마치 사후에 누가 비난해도 좋으니 자신은 대한민국을 책임지겠다며 구국의 결단을 내린 아버지를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많은 국민이 피를 흘리고, 죽고, 다치고, 고통을 받았는지 모르고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주장으로, 그러한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한 채 주장하는 것으로 얼마나 자기모순이고 자가당착적인지를 모르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사고의 시계가 1979년 10월 26일에 멈춰버렸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요즘의 현상을 보고 있으면,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말한 것에 대해, 국민들은 박정희 무덤이 아닌 박근혜 후보에게 비난을 쏟아 붓고 있는 형국이다. 그녀가 과연 이 비난의 형극을 잘 극복하고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인혁당사법살인사건은 한 마디로 말해, 무고한 민주시민을 혹독하게 고문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낸 뒤 이를 근거로 가짜 공산주의자, 아니 가짜 간첩으로 만든 뒤 사형을 선고하여 선고 다음 날 곧바로 사형시켜버린 사건이다. 다시 말해 간첩 아닌 자를 간첩으로 조작한 후 무고한 백성을 사형시킨 국가가 살인자가 된 사법살인사건인 것이다. 이는 결국 존재하지 아니한 간첩, 다시 말해 북한의 침해행위가 없는 데도 조작된 가짜간첩사건을 통해 마치 북한이 남한을 침해할 것처럼 불안감을 조장한 후 그러한 침해행위를 사전에 막아내어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서 독재를 할 수밖에 없다는 황당한 정치논리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인혁당재건위사건 말고도 주기적으로 민청학련사건, 남민전사건, 오사카재일한국인간첩조작사건 등을 터뜨려 계속하여 북한이 남한에 간첩을 파견하고 그 간첩들의 간첩행위를 통해 남한을 전복하려고 한다는 허위사실을 박정희 정권이 스스로 조작하여 만들어낸 후 이를 국민들에게 퍼뜨려오는 공작정치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이랬을 때 파견하지 아니한 간첩을 파견하였다고 몰매를 맞은 북한사람들은 또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남쪽을 봐도 어처구니 없고, 북쪽을 봐도 어처구니 없는 행태였지 않나 싶다.


이러한 간첩조작사건들이 사십년의 역사가 흐른 후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모두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 근거한 간첩조작사건이었음이 밝혀졌고, 국가가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을 해주고 있으니, 과거의 잘못이 현재에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는 이러한 것을 모두 역사에 맡기고 미래로 나가자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신옹호의 행태를 보면 그녀는 역사를 1979년 10월 26일 밤부터 계속 이어가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43살에 5ㆍ16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18년 후인 만 61세에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었다. 1952년생인 그의 딸 박근혜 후보가 만일 18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의 아버지가 죽은 나이인 만 61세에 대통령이 되어 5년간 국정을 책임지게 된다. 숫자놀음 같지만 묘한 연속성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절감한다. 196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해 집권한 1970년대는 말 그대로 긴급조치 1호, 4호, 9호로 상징되는 민주주의 암흑의 독재시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헌법을 개정합시다.”라고 말하면 형사처벌하도록 되어 있는 위 긴급조치를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를 20대 청년으로 살아야 했던 필자는, 신혼여행을 갔다 와 친구들을 초대해 조촐한 집들이를 했던 그 날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음이 크로스 오버되어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홍사덕 의원이 부정한 돈 6,000만원을 받았다고 형사고발되어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하고, 송영선 전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려면 1억5천만 원을 지원해야 한다며 한 기업가에게 부정한 돈을 공공연히 요구한 것 때문에 전격적으로 제명당하였다. 이렇게 사흘이 멀다 하고 터지는 측근들의 비리로 인해 새누리당 대선후보 박근혜 의원의 앞날은 험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기존 정당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체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삶을 살아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안철수 교수의 18대대통령선거출마공식발표가 서로 비교되면서, 18대대통령선거의 향방이 과연 어떻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겠지만, 1979년 10월 26일에 멈춰서버린 박근혜 후보의 사고와 인식의 시계가 33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2012년 9월 21일에 어떻게 접목될 것인지 염려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2012년 9월 21일이다. 오늘은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상징되는 소통의 시대, 어울림의 시대, 함께 춤추는 시대, 함께 걷는 시대, 음험한 거짓이 통하지 않는 시대, 탐욕이 곧바로 폭로되는 시대, 무인감시카메라가 거짓된 삶을 사는 자의 숨통을 조여 오는 시대, SNS로 상징되는 상상력의 시대이다. 자, 우리 모두 89일 뒤로 다가온 18대대통령선거결과를 모두 상상해 보자. 어떻게 될 것인가, 시계는 지금도 찰칵찰칵 1초씩 흘러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국가안보에 철저해야 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가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 1965년에 제정되어 학창시절 내내 암기해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한 문장을 차용한다. 새로운 시대가 과연 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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