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 교수] 배려가 상실된 세상
상태바
[오시영 교수] 배려가 상실된 세상
  • 법률저널
  • 승인 2010.08.16 0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먹더위다. 올여름처럼 이렇게 더운 여름을 경험해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차안 에어컨이 시원하니 길거리 더위를 모르고, 건물 안 에어컨이 시원하니 집안 더위를 모른다. 날씨가 너무 더운데 더위를 모르고 사는 나는 바보다. 뙤약볕을 걸어야 할 일이 생겼다. 걸었다. 더웠다. 건물 안에서 경험했던 시원함의 몇 배에 이르는 고통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건물 안의 시원함은 건물 밖의 뜨거움을 그 대가로 한다. 왜 건물 밖의 행인들은 그 더위를 감수해야 하는가? 언젠가 건물 안의 혜택(?)을 누릴 기회가 올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일까? 아님 믿고 싶어서일까? 건물 밖 도로는 말 그대로 찜통이다. 건물 안의 나와 건물 밖의 나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찜통더위의 숨막힘과 털구멍 솔깃의 차가움을 함께 겪는다. 에어컨에 익숙해진 내 몸은 이미 더위를 견디기에 너무 무력하다. 약하다. 내가 자랑스럽게 내 안에 지닌 채 감추고 있던 인내, 소위 깡다구는 에어컨의 시원함 속에 내게서 사라져버렸다. 세상의 편안함이 한여름의 나를 이렇게 나약하고 무력하게 만들다니.



 힘을 가진 자들의 전쟁방식이 달라졌다. 잔인하게 군홧발로 짓밟고, 까부시고, 붉은 피 철철 넘쳐흐르는 총질을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을 취하면 무서워하며 힘없이 무릎 꿇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나 죽고 너 죽자며 달려드는 걸 몇 번 경험한 지라 전투방식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달콤한 사탕을 사 먹이고, 굶주린 배를 불리게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으며, 편안한 소파에 몸을 안기도록 자리를 만들어주면서, “나는 네 편이야.”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달콤한 사탕에, 그 맛있는 음식에, 그 포근한 소파에 저절로 익숙해져,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 알지 못한 채 물먹은 솜털처럼 제 풀에 나가떨어지도록 변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시간은 힘을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장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힘없는 자들은 배고픔으로 계속하여 싸울 여력이나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정말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힘 가진 자들의 위와 같은 훈육법에 순치되어,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새장은 자꾸 넓어지고, 그 안에 갇힌 새들의 숫자도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마지막 남아 있는 의식은 날갯짓을 파닥거려야 한다고, 언젠가 새장을 나가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야 한다고 자꾸 의식의 날을 뾰죽히 갈아보지만, 힘을 가진 자들의 새장이 이중 삼중으로 견고하여 그 막을 뚫고 나갈 수가 없게 되어간다. 간신히 이중, 삼중의 막을 뚫고 나가도 또 다른 사중의 막에 부딪히게 되니 아예 기가 죽는다. 막막하다. 끝없는 사막을 걷는, 버려진 자의 심정이다. 걸어도 걸어도 사막이고, 걸어도 걸어도 모래밭이다. 이 막막함 앞에 의식은 이미 혈관을 뚫고 나간다. 여기저기에서 폭발음이 들리지만, 여전히 새장의 벽은 두텁다.


 

 소통은 작은 배려이다. 상대방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아픔을 보듬어주며, 네 곁에 내가 있다는 위로이다. 소통은 입이 아니라 귀이다. 부처님의 귀가 크고, 예수님의 귀가 크다. 아니 귀가 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듬는 마음이 커야 한다. 아니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마음이 작아야 한다. 저 어린 것이 저 무거운 것을 어떻게 들고 갈 수 있을까 싶어 대신 들어주는 작은 마음이어야 하고, 아니 저 할머니께서 저 무거운 것을 어찌 이고 갈 수 있을까 싶어 대신 져주는 작은 마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놈의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런 작은 마음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먹고 살기는 나아져 가고 있다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손전화기를 다 들고 사는데, 아이폰인지 스마트폰인지 모르겠지만, 그 작은 거, 손바닥보다 작은 거 그거 하나 들고 있으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고, 다 소통할 수 있다는데 어이된 영문이지 세상은 여전히 불통이고 답답하다.

그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국무총리실 공직지원윤리관실인지 공직윤리지원관실인지 이름도 참 요상스러운 곳의 불법사찰수사가 윗선에 대한 연결고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수사종결로 치닫고 있다. 청와대는 인사개각을 단행해 국정을 쇄신하겠다며 총리와 장관 몇 사람을 갈아치웠지만 면면을 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일 뿐, 배려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작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외교ㆍ통일ㆍ안보라인 장관들은 모두 유임되었다. 이렇게 소통을 부르짖으면서도 야당이나 국민에 대한 배려가 철저히 무시된 인사가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 4대강공사도 계속해서 강행군이다. 참으로 무서운 집념이다. 하기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무기력보다는 무언가 집중해서 밀어붙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나아감이 방향이 잘못 되고 옳지 않은 길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결과가 두려울 뿐이다.


 

 북한군이 며칠 전 대포 100여발을 NNL부근을 향해 쏘았다. 물론 우리 정부와 미국은 군사긴장상태를 야기하는 좋지 않는 태도라며 북한을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어쩌랴? 바로 그 며칠 전 우리 해군과 미국군은 수만 발의 총알과 폭탄, 어뢰를 쏘며 “불굴의 의지”라는 제목의 한ㆍ미군사훈련을 동해바다에서 감행하였음을. 우리가 쏘아댄 수만 발의 총알에 대한 인식은 지워진지 오래이고, 북한이 쏘아댄 100여발의 대포알만 각인되어지는 세상, 그러한 의식 속에서 남북 간의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양곡 창고에서 쌀이 남아돌아, 쌀 보관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썩어나가는 곡식을 어찌하지 못하면서, 사료용으로 써야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이 판에 북한은 먹을 것이 부족해 야단이고, 러시아의 대형 산불사태로 인한 곡물수출중단조치에 천정부지로 치솟는 국제곡물가를 지켜보면 판단이 어지럽다. 중국이 홍수피해로 정신을 못 차리고, 인도가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아마도 금년 곡물공급량은 예년에 비해 급격하게 감소할 것이고, 그리 되면 내년 국제곡물가가 장난이 아닌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모든 것이 소통의 부재이다.


 

 미국이 유엔에서 결의한 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이란제재롤 단행하면서, 우리 정부도 이에 따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미 미국이 무례함을 보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번의 무례함도 접기로 하겠지만, 이란 정부는 주한이란대사와 부통령을 통해, 이에 우리 정부가 동참할 경우 훨씬 더 많은 불이익을 우리가 당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번에 미국의 이란제재는 유엔 결의사항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가 이에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집요하다 할 정도로 이란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란은 중동국가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국가이고, 우리와 무역거래량도 클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국내소비량의 약 7% 정도에 이르는 석유수입국가이다. 그렇지 않아도 리비아의 외교관간첩사건으로 인하여 중동국가와의 관계유지가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는데, 이란과의 관계마저 어렵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다 지나친 한미동맹관계의 강화에서 빚어진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 아니겠는가?


 

 중국과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왜 이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를 경직시키면서 한미동맹관계에 올인하는지, 대북긴장관계를 고조시키면서 국내에서는 밀어붙이기식 일방통행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패거리문화, 떼거지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상지대학의 재단 정이사 선임에 대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이치에 맞지 않는 황당한 결정을 보면서, 상식이 실종한 사회의 극심한 한 단면을 본다. 사학비리로 물러난 재단이사들을 다시 받아들여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에 새로운 분쟁을 조장하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들의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질 정도이다. 모든 것이 소통부재이다. 작은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급하고 급하다. 저 건물 내부의 뜨거운 바람을 사정없이 도로 밖으로 품어대는 대형빌딩들의 에어컨 속성, 그 안의 나만 시원하면 된다는 몰염치의 철학이, 과학과 편리함의 이름으로 공인되는 세상, 그 세상에 우리는 내팽개쳐 있는 것이다.


 

 정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 내가 제대로 세상을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힘 있는 놈은 뭐든지 제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깡패와 안 깡패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 개각으로 물러난 정운찬 총리를 비롯한 몇 몇 장관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내려온 지 며칠 되셨는데, 그 자리가 그립지 않으십니까? 야인으로 돌아오시니 기분이 어떠십니까? 걱정 없으시다고요? 뭐 며칠 이렇게 시간 죽이고 있다 보면 또 좋은 자리 생길 것이라고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통이 깨어질 것 같은 먹더위도, 뭐, 길어야 두어 주 아니겠습니까? 씨언한 바람이 불어올 가을을 기다려봅시다. 씨언한 바람이 불어올 가을을......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