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 교수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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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교수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9.12.0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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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매를 든 대통령, 죽은 적이 없는 4대강 살리기!


  내가 지금까지 오십대 후반의 나이를 살면서 결코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뺨을 맞았던 일이다. 그때 당시 얼마나 심한 굴욕을 느껴야 했던지 그때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나는 나를 때린 그 사람을 용서했지만, 맞았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어떠한 사회현상을 보면 더 생생해지니 이 일을 어찌할꼬. 내가 갓 나이 스물이 되어 군에 입대했던 1973년 가을 어느 날, 그 날도 열심히 무거운 M1 소총을 들고 연병장을 돌고 또 돌며 훈련인지 기합인지 구별되지 않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던 때였다. 계급 자체가 없던 훈련병이었던 나, 그때 훈련을 지휘하고 있던 오 씨 성의 소위계급장을 단 장교가 나를 지명하자 나도 모르게 “예, 오 소위님” 하고 큰 소리로 대답을 했었다. 그랬더니 내게 돌아온 것은, “왜 그러나?” 정도의 딱딱한(?) 답변이 아니라 곧바로 눈에서 번쩍 번갯불이 튀는 것 같은 충격을 안겨준 뺨맞는 통증이었다(왜 하필이면 그 장교가 나하고 성이 같은 오 씨였는지 모르겠다, 우스갯소리지만 성이나 달랐다면 조상이라도 욕을 하면서 내 억울함을 풀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게 원천봉쇄당했으니 말이다). 그러더니 오 소위라는 그 친구는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계속하여 내 뺨을 오른쪽 왼쪽 가리지 않고 가격하더니 급기야는 자신의 철모를 벗어 철모를 쓰고 있는 내 머리통을 가격하여 급기야는 나를 연병장 바닥에 나뒹굴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등을 돌리며 내게 내뱉었던 한 마디는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앞으로 소대장님이라고 불러......”


  오 소위님 이라고 불리는 것 하고, 소대장님 이라고 불리는 게 얼마만한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때 오 소위라는 그 양반 나이가 나보다 많아야 한 살 아니면 두 살 정도 많았을 것이니,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이인데, 자기는 소대장이고 나는 훈련병이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적 차이라고 느꼈으면, 군의 생리를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입대한지 며칠 되지 않은 나로부터 “소대장님”이라고 직책을 불리지 못하고 “오 소위님” 하고 계급을 불리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분노했는지 나는 지금도 영문을 잘 모르겠다.


  내가 군 생활을 했던 1973년부터 1976년까지 34개월 동안 군 내부에서는 소위 “빳다”라고 불리는 두들겨패기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Bat 하면 프로야구의 홈런왕 김상현이나 Batman을 떠올리거나 전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노키아의 박쥐 문양 핸드폰를 떠올리게 되지만, 왜 당시에는 배트라고 순하게 발음하지도 않고 빳다라고 억세게 발음하면서 빳다라는 소리만 들으면 오금이 저리고, 이 갈리는 느낌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어감조차 싫어지는 그 빳다로는 주로 야전용 침상의 받침용 각목이 이용되곤 하였다.


 졸병시절 거의 매일 밤마다 “집합”이라는 황당한 구호 한 마디면 40명 남짓의 전 내무반원이 침상 앞 일렬 정렬을 하여야 했고, 무슨 잘못한 게 그리 많은지, 매맞아야할 이유가 그리 많은지 고참병은 때리고 또 때리고는 하였다. 지금도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지만 왜 그때 혼자서라도 정당한 반항을 하지 못했는지 기가 막힐 일이다. 세상이 그렇게 조직화되다보면 혼자서라도 대항해야겠다는 의지를 상실해 버리지 않나 싶을 뿐. 그때 당시는 차라리 매를 빨리 맞아야 하루 밤 편히 잠잘 수 있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졸병들끼리 나누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날은 성탄절을 앞둔 토요일 저녁이라 고참병이 회식을 하자고 하여 다들 즐겁게 막걸리를 사다 놓고 한 잔씩 술잔을 나누고 있었는데, 무슨 일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갑자기 고참병이 회식 도중 “집합”이라고 외쳤고, 회식을 하던 졸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또 다시 침상 앞 일렬 정렬을 하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말도 되지 않은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중고참 상병 몇 명을 군화발로 차기 시작하던 순간, 우당탕...... 하극상이 벌어져버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중고참 상병 몇 명이 그 최고참병을 두들겨패기 시작했고, 그날, 성탄절 축하회식은 그렇게 잊혀지지 않은 하극상의 반란으로 끝났다. 물론 그 다음날, 최고참병은 가혹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영창, 중고참병 몇 명은 역시 하극상을 했다는 이유로 영창, 최고참과 중고참이 모두 영창으로 가버리는 통에 며칠간은 빳다의 악몽에서 벗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 없는 세상, 여우가 왕이라고, 또 다시 차례대로 고참으로 승진한 또 다른 악당들이 빳다를 휘두르기 시작했으니, 배운 도적질은 어찌할 수 없었던 듯싶다.


  1976년 8월 어느 날, 나는 제대를 했다. 졸병들이 전역하는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마련해준 회식시간, 한 마디 하라는 졸병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자랑할 게 하나도 없지만 꼭 하나 하라고 한다면 군대생활 3년 동안 한 번도 빳다를 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였다. 그렇게 고참들로부터의 폭행이 일상화되어 있던 군시절, 나만이라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한 번도 빳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 덕이었든지 몇 명의 졸병은 내게 눈물을 보이며 좋은 분으로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덕담을 해주기도 했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때도 폭력이 싫었고 지금도 폭력이 싫다. 아들 녀석을 키우면서도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말로 하고 먼저 솔선수범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명박 대통령이 요즘 케이티엑스를 비롯한 노조의 단체행동권 행사에 대해 철도공사를 방문해 “우리 젊은이들도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고 있는데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보장받고도 파업에 들어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거나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한 대처”를 지시하는 것을 보면서, 아니 그 이외의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계획변경안을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서 왜 자꾸 군대시절의 “오 소위님”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이명박 대통령이 반드시 틀린 것도 아니다. 양쪽이 다 맞을 수도 있고, 다 틀릴 수도 있으며, 어느 한 쪽이 맞고 다른 한 쪽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자기 생각이 있어 반대하는 것이고, 케이티엑스 노조의 단체행동권 행사는 노동관련법이 정한 모든 정당한 절차를 거친 후의 합법적 쟁의인데도 이를 일방적으로 불법파업이라 규명짓고, 세종시 문제도 이미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으므로 이를 수정하고자 하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반대의견을 수렴하여 법을 개정하여 시행하면 된다. 낙동강가에서 골재채취노동에 종사하는 김후범씨의 “멀쩡한 강을 죽었다고 우기는 것이 더 기가 막히다.”는 말이 더 와 닿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종시로의 행정도시 이전의 큰 목적은 수도권과밀화해소였다. 그런데 요즘 수도권과밀화해소라는 본질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찾아볼 수도 없다. 오직 세종시의 자족기능만을 문제삼아, 세종시의 자족기능이 없으니 정부부처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옮겨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울시에서 세종시까지 지금 파업 중인 케이티엑스를 타면 3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서울종합청사에서 과천종합청사 가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행정부처의 이전이 있게 되면 수도권과밀화가 많이 해소될 것이다. 4대강도 언제 죽은 적이 없다. 지금도 살아서 도도히 흐르는 강이다. 죽은 적이 없는 강을 “4대강 살리기”라고 이름붙이고 살리겠다고 하니, 멀쩡한 사람에게 인공호흡하겠다고 달려드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도 엄청난 돈을 들여 산소호흡기를 사들고 말이다.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대통령이 불법파업이라 미리 규정짓는 바람에 사용자들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았으니 합리적인 노사간의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대통령이 매들 들면, 세상에는 회오리바람이 불고 채찍질이 난무하게 된다.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이 물론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독재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 민주주의라는 것이 느리고 더디고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그래도 서로의 반대의견에 귀 기울이고 합리적인 의견교환을 통해 상호간에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차선책을 강구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께서 매를 든 손을 살며시 거두시기를 바랄 뿐이다. 40여년 전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새벽기도와 그때 가난한 자들을 함께 생각하겠다고 다짐하시던 당신의 각오를 떠올리실 수 있기를 나는 지금 기도합니다. 세상 참 춥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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