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의 법과 김지하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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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의 법과 김지하의 밥
  • 법률저널
  • 승인 2009.10.0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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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위는 죽음과 반갑게 악수하는 날이다. 죽은 이를 만나기 위해 전 국민이 같은 날 이심전심으로 대이동하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영안실을 설치하는 병원이나 성당에 대하여 자기 동네에는 절대로 설치할 수 없다며 결사반대투쟁을 하고, 화장장 설치를 적극 반대하는 님비현상을 보면 유독 죽음을 유독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니 한가위만 되면 모두들 죽음을 만나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마다하지 않으니, 우리 국민을 이중적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몇 대 조상을 찾아 성묘를 하고 술 한 잔 따르려는 효심을 보이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하나 효성이 지극한 자손이라고 칭찬을 해야 하나 그것도 나는 잘 모르겠다.

  한가위는, 따뜻함과 서늘함이 교차하는 반전의 날이자, 보름달이 졸아들기 시작하는 겸손의 날이다. 한가위는 최소한 사흘은 배 부를 수 있는 날이고, 가진 자들이 곳간을 열어 관대한 척 베풂을 연출해 보일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한가위는 청년과 노년의 갈림길을 깨닫게 하는 날이기도 하고, 태양과 묘지가 갈 之자로 교차하는 날이기도 하다.

  한가위는 기쁨과 외로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날이다. 기쁨에 들떠 환호작약하는 이가 있기도 하고 외로움이 극에 달해 자살을 망상하는 이가 넘쳐나기도 하다. 한가위는 이 신문의 주요독자인 고시생들에게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독을 안겨주는 힘든 날일지도 모른다. 고시원 주변의 상가나 식당은 명절이라 문을 닫는 곳이 많아 다들 잔치를 벌리며 평소보다 잘 먹고 웃고 떠드는데 고시원 작은 골방에서 외롭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막연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해야 할지도 모르고, 왠지 고시원의 난방시설이 차갑게 느껴져 겉옷을 하나 꺼내 더 걸치며 쓸쓸함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찌 인생을 논할 수 있으랴? 미래에 대한 꿈으로 오늘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바랄 뿐이다.

  우리 언어만큼 반의법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언어가 있을까? 이번 주 내내 내 입가를 맴도는 말은, “법 좋아하네.”였다. 그리고 “웃기고 있네.”였다. 법적용의 잣대가 하도 황당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법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는다. “법 좋아하네.”나 “법 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법을 어긴 사람이 힘만 믿고 횡포를 부릴 때 당하는 입장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내뱉거나, 법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는 약자를 향해 법을 어기는 자가 힐난조로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되었든, 법이 휴지 조각이 되는 순간이고, 아니 법이 흉기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왜 내가, 변호사이자 법대교수인 내가 저렇게 법을 우습고 초라하게 만드는 저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뱉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쓸쓸한 한가위이다. 

  “법”이라는 단어를 한 번 발음해 보라. 첫째 음과 받침 음이 모두 “ㅂ”으로 끝나는 법이라는 단어는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입술이 터지면서 발음이 되어 나오다가 곧바로 입술이 닫혀 버리고 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ㅂ”은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닫아 폐쇄하여 공기의 유통을 일단 완전히 막았다가 터뜨리며 발음해야 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발음기관상으로는 양순음(兩脣音)이고, 발음법상으로는 터짐소리, 곧 파열음(破裂音) 중 내파음(內破音)에 속한다. 울림의 유무로 볼 때는 무성음(無聲音)에 속한다. “ㅂ”은 밀폐된 소리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단어에는 “ㅂ”이 두 개나 들어 있어서 소리가 입술 밖 세상으로 나오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법”이라는 소리는 크게 발음하려고 해도 크게 울려 퍼지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지고 만다. “법”이라는 소리는 말하는 이도 시원하게 소리가 뻗어나가지 않으니 답답하고, 듣는 이도 명쾌하게 들리지 않으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법은 안으로 진실을 껴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운찬 내각이 이명박 대통령의 임명으로 정식출범하였다. 인사청문회를 통해 밝혀졌듯이 법을 어겨도 저렇게 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법을 다양하게 어긴 면면들로 정운찬 내각이 짜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법 좋아하네”라는 자조의 말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매학기초 나는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법학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정의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강변해 왔다. 거기에 덧붙여, 그러기에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졸업할 때쯤 자신이 의욕하지 않았더라도 저절로 지도자로서의 덕성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법학은, 경제학처럼 빵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의학처럼 병든 자를 치료하지도 않고, 공학처럼 사람의 편리를 도모해 주지도 않고, 음악이나 미술처럼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도 않지만, 공부하는 내내 “정의”라는 가치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대답하게 만드는 학문이기에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해 온 것이다.

  그런데 사회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저렇게 법을 어기며 자신의 호의호식을 위해 정의에 대한 인식도 없이 무개념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그냥 머리가 좀 좋아 학교공부를 좀 잘한 것 때문에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교수가 되고, 배운 학문을 그대로 기술적으로 활용하여 책을 쓰고 좋은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살아온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게 어때서?”라고. 하지만 그게 혼자 잘 먹고 잘 살 때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마는, 공직에서 모든 이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자리라면 그 기준이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김지하 시인이 “밥”이라는 시를 통해 “밥은 하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는 “밥”에 대해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으로 밥이 하늘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고 밥을 입으로 먹는 것은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으로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정운찬 총리와 딱 한 번 밥을 먹었던 인연으로 지난 9월 26일 조선일보에 정운찬을 옹호하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밥을 함께 한 번 먹었으니 그가 시에서 표현한 대로 “하늘을 함께 가지게 된 인연”을 맺은 모양이다. 정운찬이 모기업체로부터 “천만 원”을 받았다고 야당의원의 추궁 앞에 마지못해 시인한 것을 솔직한 용기인 듯이 묘사하며, “총리 못하면 어떠냐?”라는 배포인 듯이 포장한다. 그러나 정운찬은 총리를 하기 위해 야당의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하는 등 못하면 어떠냐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 있지만 정말로 하고 싶다고 하였고, 받은 돈도 그까짓 천만 원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김지하 시인은 정운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한마디로 ‘×’ 같아서 이 글을 쓴다.”라고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나타내고 있다. 나는 시인인 고로 상상한다. 저 “X”가 과연 무엇일까? 김지하 시인의 입담으로 보아, 지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해 달라고 기자에게 신신당부한 것으로 보아, 아마 모르긴 해도 “좃”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이 부분은 전적으로 시인인 나의 상상력일 뿐이다. 독자들은 그냥 그리 알아주기를 바란다,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마시고. 이런 직설적인 단어를 쓴다고 해서 신문의 품격이 떨어지는 양 엄살을 부리며 영어문자로 ‘X’로 표현하는 조선일보가 나는 좀 우습다. “눈 감고 아웅”하는 모습이 언제나처럼 변함없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좃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신성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저 단어가 욕으로 사용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저게 없으면 못 살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비하할까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기도 한다).

  김지하 시인이 정운찬 총리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정운찬과 스코필드 박사와의 대화의 예화에 나는 황당해진다. 어느 정도 각색이 되었겠지만, “돈 있어?”, “없습니다.”, “줄까?”, “네.”, “언제 갚을 건데?”, “못 갚습니다.”, “어째서? 갚을 돈을 벌 자신이 없어서?”, “네.”, “그래. 그래야 한다. 그런 태도로 살아야 한다.”라는 대화이다. 그러면서 김지하 시인은 정운찬 총리가 그런 태도로 총리 한다면 이 위기 국면, 거대한 문명사 변동의 한복판인 한반도의 지금 이 국면에 평소의 그 소신과 경제ㆍ사회 노선의 그 원만하면서도 날카로운, 중도 진보의 참다운 빛을 보탤 것이 분명하다고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저 예가 타당한 것일까? 본인의 의사야 그렇지 않겠지만, 저 대화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은혜를 입고서도 이를 갚지 않겠다며 대놓고 공언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배은망덕이 있을 수 있는가?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 것 아닌가?

  “천만 원짜리 개망신”이라는 제목도 황당하다. 밥과 법은 “아”와 “어”만 다를 뿐 양순음의 “ㅂ”이 두 개 들어 있는 같은 구조의 단어이다. 하나는 몸의 건강을, 다른 하나는 사회질서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 밥을 함께 나누자는 김지하 시인이 밥 한 끼 같이 먹은 인연밖에 없는 정운찬 총리의 법위반행위를 옹호하며 진리를 규명하자는 이들을 향해 “좃 같아서 이 글을 쓴다.”라고 말에, 나는 그냥 밥을 먹고 싶어질 뿐이다. 배가 고플 뿐이다. 용산화재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눈물이 고프고, 죽어라 일을 해도 최저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고플 뿐이다. 그까짓 천만 원쯤으로 개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밥은 무엇이고, 법은 무엇일까? 너희 힘 없는 이들은 저 두 단어가 양순음이니 입술을 다물어야만 되는 소리라고? 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말......

  독자 여러분, 추석 송편 드시고, 외롭지 마세요. 삶에 한(큰) 가위 눌리지 마시고, 한가위의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안녕...... 정말 “어” 다르고 “아”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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