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압력밥솥과 냄비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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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압력밥솥과 냄비뚜껑
  • 법률저널
  • 승인 2009.04.2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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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나는 압력밥솥에서 만들어진 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밥알이 찰지고 알차 영양이 좋다고 하지만 밥알을 씹다 보면 왠지 밥알이 딱딱하니 이빨과 턱에 부담을 주어 그 밥알에 事情이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은 용서와 관용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학기초에 학생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곤 한다. “수업시간이 15분 정도만 남아 있으면, 늦어도 좋으니 수업에 임하기 바란다. 물론 다른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끝을 들고 조용히 들어와 비어 있는 강의실 뒷좌석에 앉아야 한다.”라고...... 나는 학창시절뿐만 아니라 모임에 지각해본 경험이 아주 많다. 내가 게으르게 늦게 출발해서일 때도 있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해 그 일을 애써 마무리한 후 허둥지둥 모임에 참석하다 보니 늦을 때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으로 지각한 적도 있었다. 그때 약속시간에 늦어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약속장소까지 가는 동안 내내 발을 동동 굴렀던 마음은 미리 시간에 맞춰 참석했던 때보다 그 모임에 더 절박했음을 심정적으로 경험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비록 늦었을망정 학생들이 부지런히(?) 수업에 참여하여 15분 정도의 강의라도 듣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일망정 최선을 다하면 그게 쌓여서 자네들의 인생이 되네.”라며 결석 대신 지각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다른 교수님들 중에는 5분만 늦어도 호통을 치고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훈계에 훈계를 거듭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교수님은 그렇지 않아서 좋아요.”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욕을 먹더라도 들어와서 나머지 시간일망정 공부를 하는 쪽을 택하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그 게으른 동참을 통해 현명한 불참보다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게으른 동참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늦더라도 수업에 참여하려고 들어오는 것을 뻔뻔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용기 있는 최선이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평가는 그 학생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진실에서만 찾아야 할 것이지, 교수의 눈으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세상이 누구를 단죄하든 진실은 그 사람의 마음속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믿는다.


냄비뚜껑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불 위에 놓고 끓이는데 사용되던 예전의 용기 대부분에는 뚜껑에 숨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냄비바닥이 뜨거워지면 그 안의 음식물이 끓기 마련이어서 팽창한 증기가 빠져 나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폭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아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게 바로 사정이다. 너의 형편을 내가 알아 미리 구멍을 하나 뚫어주는 것, 내 형편이나 까닭을 네게 말하고 무엇을 간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정 아니겠는가?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발달하다 보니 압력밥솥은 더 이상 숨구멍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밥솥 안의 수증기가 아무리 뜨겁고,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아우성을 치든 밥솥뚜껑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밥솥 안의 공기를 통제하고 찍소리 하지 못하게 만든다. 통제자로 군림한다. 그러다 보니 아주 간혹 압력밥솥이 폭발하였다는 뉴스를 접하기도 한다.


숨구멍이 없는 압력밥솥과 숨구멍이 있는 냄비뚜껑, 이게 세상의 이치이다. 나는 그 숨구멍이야말로 “힘없는 자들의 사정”이라고 생각한다. 힘 가진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보듬어 안아 주는 것, 숨 막혀 죽지 않도록 작은 배려를 해주는 것, 그것이 냄비뚜껑의 숨구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20일, 인터넷 논객(?)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다가 구속되었던 미네르바 박대성씨에 대한 법원의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 나는 지난 1월 16일, 법률저널의 본 칼럼을 통해 “이명박 정부여, 도대체 왜 이러는가?”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그 글을 통해 미네르바에 대한 구속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우리나라 언론의 자유를 옥죄고 뿌리채 뒤흔드는 잘못된 언론정책인지를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의 글은 정제되어 있지 않았고, 내용도 깊이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어쩌다 인터넷에서 주목을 받았을 뿐인 글들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법부가 그러한 견해에 일치한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하여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압력밥솥”의 횡행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옛 속담에도 “고양이도 쥐가 도망갈 길을 만들어 놓고 쫓는다.”라고 하였고, “전쟁에서도 적군의 퇴로를 만들어놓고 공격한다.”라고 하였다. 궁지에 내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직접 대드는 장면을 나는 여섯 살 때 본 적이 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쥐가 고양이에게 대드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그 기억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아주 간혹 나도 궁지에 몰린 쥐처럼 나보다 강한 자에게 대들어보기도 하고, 또 고양이가 되어 나보다 약한 자를 위해 작은 배려를 하기도 한다. 나는 때로는 고양이가 되기도 하고 쥐가 되기도 하며 세상을 살아온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司正當局의 칼날에 事情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아주 신나 보이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젊은 검사들과의 대화였고, 전국에 생방송된 그 대화에서 당시 노 대통령은 젊은 검사의 집요한 질문에 “그럼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답변했던 상황이 오버 렙 된다. 아마도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반 죽여 놓을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의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될 수도 있었을, 어쩌면 다른 역대 대통령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대통령의 이미지가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게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대기업재벌들로부터 수천억을 받기도 했는데, 그가 받은 것은 그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데도 너무 한 것 아니냐는 동정의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그 역시 그것을 받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통치철학 중 일부에 긍정적인 면이 있었기에 그의 일부 잘못에도 불구하고 일정부분 그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었는데, 아쉬움이 대단히 크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잘못은 잘못이고, 그가 추구했던 방향성은 옳기에 현 정부도 어느 정도 계승발전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힘을 가진 자들이 계속하여 압력밥솥의 역할만을 하겠다고 하다 보면 대부분 통제되기야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폭발할 수도 있음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미네르바에 대한 사법부의 무죄 선고가 그 한 역할의 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힘의 무한질주가 아닌 일정한 브레이크의 기능을 위 선고가 해주고, 힘을 가진 자들이 조금은 여태까지의 행진을 되돌아보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북한의 인공위성발사로 촉발된 남북관계의 경색은 이제 남북관계에서 마지막 통로로 남아있는 개성공단으로 불통이 튀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의 참여 방침”은 북한을 압력밥솥 속의 쌀알, 아니 보리알로 만들어가고 있다.  북한이 그대로 익혀질 것인지, 아니면 덕지덕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밥덩어리가 되고 말 것인지, 죽음 단계에 이르게 된 북한의 경제사정과 정치상황이 독자생존의 길을 걷기 위해 독한 정책을 쓰는 형국에 이르고 있다.


50년 넘게 세상을 살다보면, 참으로 온전한 인간은 없겠구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얼어 죽지 않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어찌 선하게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허물 많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압력밥솥의 무한 압력이 아닌 냄비뚜껑의 숨구멍 하나 남겨 놓고, 사정 보아줘 가면서 서로 돕고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邪正을 가리겠다며 司正의 칼날을 갈면서 査定하고 있는 자들에게 私情이 없기를 바라면서 그래도 事情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길 뿐이다. 지금 누군가를 司正하는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 앞에서 司正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살아서 인간 앞이 아니라면 죽어서 신 앞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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