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장순금 시인의 “나는 문어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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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장순금 시인의 “나는 문어다리다”
  • 법률저널
  • 승인 2009.04.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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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명색이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하나 가지고 있다 보니 동료시인들의 시집을 일반 독자보다 우선하여 받아보는 기쁨을 자주 갖는다. 제 돈으로 시집을 사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드는지, 그전보다 시집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푸념도 자주 듣는다. 청년시절, 몇 편의 시를 펼쳐놓고 밤새 이를 암송하며 언어의 유혹에 빠지던 때가 있었다. 좋은 한편의 시, 가슴에 와 닿는 한편의 시인의 마음을 접하면 몇 번이고 읽으면서 뜻을 음미하며, 시인의 마음을 훔쳐보고, 내 마음을 도적질당하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매양 황홀한 유혹에 빠져 행복을 맛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지만, 최첨단 디지털시대에 많은 독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시를 접하고 있을 거다. 수많은 인터넷 블로그에, 카페에 시들을 퍼다 나르고, 소개하고, 영상이나 음악과 함께 감상하고 있음을 보면서 약이 오를 때도 있다. 시인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제 심장 갉아먹으며 지은 시를 저렇게 쉽게 공짜로 사용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작품으로 발표된 시는 그 시인의 소유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읽어주는 것만이라도 고맙다며, 돈 되지 않는 시를 돈 들여가며 발표하는 시인들은 21세기 極資本主義時代*에 맞지 않는 족속이다. 하지만 종이시집을 펼쳐들고 종이향내를 맡으며, 활자의 잉크냄새를 맡으며, 어쩌다 쌓여있는 먼지내음을 맡으며 시인과 홀로 밤늦은 시간에 대화를 나눌 때 갖게 되는 기쁨을 어찌 인터넷 활자가 대신해 주겠는가? 동료시인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한밤에/뒤꿈치 들고 숨죽이며 골목을 벗어나/남의 집 높다란 담장을 넘어/달빛 아래 칡넝쿨과 뒤엉켜 한판 걸판지게 놀고 있다//새벽 창 뿌옇게 일어서면/분홍빛 혀로 온몸 옥죄어 속잎 틔우던/엉킨 팔 다리 살살 풀어/풀다가 생살이 뜯겨나기도 하겠지만/옷깃에 묻은 별빛 털어내고 바람이 잡은 손도 살며시 내려놓고/첫닭이 울기 전에/촉촉한 몸으로 돌아와 가시덤불 끌어안고 모로 누워 있다/햇빛 반짝! 눈부시면/천연덕스레 담장 위로/달랑 올라//오늘도/좋은 아침! (장순금 시인의 “나는 나팔꽃을 좋아한다” 전문, 시집 “햇빛비타민”에 수록, 종려나무 간).


나팔꽃은 해가 짐과 동시에 개화작업에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자신만의 노력이다. 그러다가 새벽 네 시쯤 꽃망울이 열리기 시작해 다섯 시경이 되면 완전히 피어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밤새 언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냐는 듯 모든 이들에게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하고, 서너 시간 피었다가 아홉시 전후해서 지고 만다. 나팔꽃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상징이다. 부지런함, 생명력, 희망, 아침 햇살로 다가온다. 하지만 시인은 그 나팔꽃이 어둠을 뚫고 생명으로 잉태되기 위해 달빛 아래 칡넝쿨과 씨름하고 있음을 관통한다. 온몸 옥죄어 들어오는 세상과 싸워 살아남고자 치열하게 저항했음을 갈파한다. 제 몸 풀어 세상에 나오고자 생살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햇살 비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보는 이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는 현실 속의 미래를 본다. 우리 모두가 나팔꽃이었으면 싶다. 어둠의 터널이 아무리 길더라도 햇빛 쏟아지면 모두를 향해 “안녕”이라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나팔꽃이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의 나팔꽃이고, 내가 너의 나팔꽃이었으면 참 좋겠다.


위 시집에 실린 또 다른 시 한편을 본다. “내통”이라는 시다. 어느 발레리나의 발이 화면에 클로즈업 됐다//하루 열아홉 시간씩 굴려 뼈가 휘어진/발의 가락들/공중으로 솟구치는 힘//꽃무더기 우주 속으로 폭발하며 아라베스크, 날아오르는 동안/발톱은 달아나고 발가락은 구부러져 땅을 파고들고//흙속에서 갓 캐내온/울퉁불퉁 터진 저 기형의 힘이/한 마리 백조의 꽃다발을 공중에 띄웠다//하늘과 내통하는 길은 시간과 피를 나누는 일이다. (장순금의 시 “내통” 전문). “하늘과 내통하는 길은 시간과 피를 나누는 일이다”라는 시인의 짧은 관조는 한 마리 백조가 되기 위해 하루 열아홉 시간씩 발레 연습에 전념해온 한 발레리나의 험한 발을 통해 형상으로 다가온다. 어느 날, 티브이에 비춰지던 발레리나 강수지씨의 발을 본 적이 있기에 위 시는 더 현실로 다가온다. 어디 발레리나의 발만 그럴까? 모르긴 해도 피겨의 요정 김연아의 발도 그럴 것이고,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도 그럴 것이다. 살아남은 자, 하늘과 내통하고자 하는 자는 일생을 바쳐 피와 땀을 나누는 고통을 견디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고통 속에 함몰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렇게 노력해도 살아남은 자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노력하면 된다고, 왜 열심히 노력하지 않느냐고 꾸중 반, 충고 반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 노력한다고 세상일이 다 잘 된다더냐? 실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어쩌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신화를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래도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는 노력하여야만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에 제자들에게 그래도 노력하라고 격려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것만이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죽은 것들도 죽은 것들끼리 모이면 아름답다는 것을.


장순금 시인의 시 한 편을 더 보기로 한다. 파리와 섞여 노는 구정물 아이들/쓰레기더미에 올라 찾아낸 고무풍선, 버려진 콘돔 불었다 빨았다//시꺼먼 젖통 출렁, 등에 매달려 보채는 아이/손가락 뒤로 벋어 입에 물리는 저,/극단의 생존//최악, 최저, 최후의 낱말 속에 하루살이처럼 윙윙거리는/목숨//생의 행간이 없는 새까만 발바닥들이 네팔의 질긴 태양 속으로 간다//진창의 바닥에서/오늘도,/먹이를 찾아낸 아이들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 웃는다//하느님도 어쩔 수 없어/아이들 등짝마다 햇빛 비타민이나 흠뻑 칠해준다(“햇빛 비타민” 전문).


가난한 네팔 아이들, 한 끼 먹을 것을 찾아 짐승처럼 헤매는 가난한 저 아이들, 생의 행간마저 없는 극단의 세상에도 하느님의 햇살은 동일하게 비추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 장순금 시인은 가톨릭 신자인 모양이다. 기독교인인 내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이 불공평하고 험악한 세상에 대한 절대자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인간들을 향해 “참으로 말들을 안 듣는구나!” 하고 한탄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간혹, 아니 자주 한다. 저 시를 접하면서 어머니께서 어렸을 적 말을 잘 듣지 않던 나를 향해 “어긋난 돼지발톱” 같다고 나무라시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돼지발톱은 어긋나 있다. 하지만 그 어긋난 돼지발톱은 육중한 돼지의 몸을 지탱해주는 힘이다. 어긋남이 어우러져 세상은 다양성을 갖게 되고 새롭게 된다고 믿는다. 장순금 시인의 시집 “햇빛 비타민”에는 참 좋은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생명의 근원을 생각게 하고, 살아가는 오늘을 생각게 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고, 잊고 있던 삶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한다. 가족을, 부모를, 이웃을, 결국 생을 생각게 한다.


“나는 문어다리다”라는 장 시인의 시를 본다. “제사를 지낸 후 문어다리 질근질근 씹다가//제 다리 끊어먹고 산다는 문어는 어떤 맘일까/허기져 스물 네 시간 몸 비틀다 기어이/제 다리 뚝 잘라 질근질근 씹는, 씹히는/문어는 어떤 맛일까/두어 달 후, 다시 멀쩡히 자라 있는 다리는 또 어떤 맘일까/생각해 보니,//(중략)//문어다리를 꿀꺽 삼키고/나직히 문어를 위해 축문을 읽었다/근이 청작서수, 상향,(”나는 문어다리다“ 일부). 사실적 표현을 통한 상징의 힘이 강한 시다. 가난한 네팔 아이들이 문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실직한 한국의 가장들이 문어다리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햇빛을 등짝에 원 없이 받고, 배고프면 제 다리 잘라 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햇살 속에서 나팔꽃으로 피어날 수만 있다면, 먼 훗날일지라도 백조의 호수를 춤추는 발레리나처럼 하늘과 내통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극자본주의사회, 자본이 極王으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그래도 난 한 편의 좋은 시를 찾아 읽으려 노력할 것이다, 법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

 

* 極資本主義는 物神의 지경에 이른 現代資本主義를 지칭한 필자의 新造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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