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02-재판부가 원고에게 말을 건네는 특별한 방식(Easy-Read 판결)

2023-01-06     손호영
손호영

출근 전 신문을 훑던 중, 눈을 의심했습니다. “최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가 한 선고는 달랐다.”고 시작되는 그 기사에서는 재판부가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야 친절한 재판부구나 싶었는데, 기사에서 다음 내용을 읽고 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판결문에도 그대로 적혔다...원고가 판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배려한 것이다.” (장택동, 동아일보 [횡설수설/장택동]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2023. 1. 3.자)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문장이 판결문에 적혔다는 기사에, 빨리 출근해서 판결문을 확인하고 싶어 몸이 달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적었을까, 무슨 사건일까, 구체와 실상을 파악하고 싶었습니다. ‘안타깝다.’가 판사의 솔직한 감정인지, 속 깊은 배려인지도 궁금했습니다.

판결을 검색하고자, 설마하면서도 키워드를 “안타깝지만”으로 넣었습니다. 바로 검색되었습니다. 서울행정법원 2022. 12. 2. 선고 2021구합89381호 판결. 그리고 기사가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판결의 [주문].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괄호로 표시된 문장은 이때껏 보지 못한 주문의 유형입니다. 제 눈은 빠르게 판결문의 [이유]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안은 이런 내용입니다. 서울 강동구청장이 2022년도 장애인일자리 사업 모집공고를 하였습니다. 행정도우미, 바리스타, 복지서비스 지원과 같은 전일제 유형(43명 선발)도 있었습니다. 선천성 중증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원고는 전일제 일자리를 신청했습니다.

강동구에서는 이틀간 면접을 실시했고, 청각장애인을 배려해 수어통역사를 배치하여 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원고는 불합격하고 맙니다.

원고는 다음 이유로 불합격취소 처분이 취소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자신은 중증 청각장애인이어서 수어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면접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면접 전부터 미리 수어통역사의 조력이 필요하며, 일반 장애인보다 가산점을 부여받아야 한다. 둘째, 전일제 일자리에는 결국 경증 청각장애인만 합격했으므로, 이는 중증 청각장애인을 차별한 것이다.

재판부는 면접 과정을 상세히 살피더니, 불합격처분은 정당하다고 판단합니다.

첫째, 모든 면접자들에게 주어진 질문 개수는 5개로 같았고, 추가질문은 없었습니다. 그 내용도 지원동기, 건강관리, 경험이나 자신 있는 일 등을 묻는 평이한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으신 말씀 있냐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20분의 시간은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나아가 면접시간은 공식적으로는 20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시간제한과 관계가 없었습니다. 시간초과를 이유로 면접이 종료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어통역사는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셋째, 강동구가 마련한 선발기준표에서는 장애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심하지 않은 경우보다 3점이 더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넷째, 공정성 때문에 수어통역사의 이른 조력은 불가능합니다. 자칫 수어통역사가 면접자들을 만날 경우 가장 처음 시험을 치른 지원자의 불신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일자리 제도 자체가 혹시 중증 장애인을 차별한 것이 아닌지 보니, 앞서 본 것처럼 유리한 점수를 부여하는 한편, 장애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심하지 않은 경우와 달리 신청자격을 2년 초과해도 가능하도록 하고 있었으며, 최근 3년 동안 6명의 중증 청각장애인이 근무한 내역이 확인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여느 판결문과 같은 방식으로 판단을 설시하고 마무리를 합니다.

여기서 멈추면 보통의 판결일 텐데, 이 재판부는 달랐습니다. 원고가 재판과정에서 낸 탄원서 때문이었습니다. 원고가 “판결문을 알기 쉬운 용어로 써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어려운 용어가 쉽지 않은 수어통역의 현실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고심 끝에 화답합니다. 그와 같은 요청은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면서, 헌법과 UN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에 따라 Easy-Read 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판결이유를 추가로 작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판결문의 가장 특별한 점은 [이유] 첫머리에 추가로 덧붙여진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입니다. 재판부는 그곳에서 재판부가 고민한 점을 밝힌 뒤(쟁점 정리), 그림을 활용한 비유도 동원해가며 판단 과정을 쉽게 설명했습니다. 다만 쑥스러운 듯, 재판부는 “다소 아쉬운 점도 없진 않겠으나, 처음으로 하는 시도이니만큼 너그럽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고 덧붙입니다.

감동했습니다. 그동안 존댓말 판결이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난 판결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의 소감과 지금 이 판결을 보고 느낀 감정은 결이 다릅니다. 이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를 마주하고 원고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재판부 자신의 필요가 아닌 원고의 요청에 응답한 점이 참 좋았습니다. 물론 이 방식이 최선이었는지는 논의 가능하겠지만, 재판부의 말대로 ‘너그럽게(?) 보고자 합니다’. 하나 더. 이 사건은 항소되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의 문장은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