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3-베니스의 유리 입찰

2021-03-26     손호영
손호영

교황청에서 유리 입찰을 실시합니다. 조선인으로 베니스에 정착한 안토니오는 상사(商社)의 대리인으로서 입찰에 참가합니다. 당시 베니스는 유리공예가 발달하여 명성을 얻은데다 품질이 독보적이어서, 베니스 상사가 납품하는 유리(venetian glass)가 낙찰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선 예사로운 업무를 통해 상사원으로서 경험을 쌓으라는 상사의 배려로 안토니오는 유리 입찰 참가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황청에서 베니스 상사가 제출한 유리제품의 견본품과 납품가를 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청에 납품하는 것이므로 감히 높은 가격을 써내 이익을 보려 하지도 않겠지만, 교황청은 원가 이하로 납품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공정한 가격(pretium itustum)에 위반된다는 이유입니다. 원가에 여러 비용과 이익을 덧붙여 적당한 가격으로 입찰가를 써내려고 하던 그때, 갑자기 피렌체 측에서 베니스 상사와 유리생산자와의 계약서가 미비함을 지적합니다. 지금껏 문제된 적이 없었던 것이기에, 트집잡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안토니오는 교황청으로부터 베니스 상사가 가계약권자임을 확인받고 40일의 보정기한을 받습니다. 그리고 15일 만에 계약서를 교황청에 제출함으로써 보정을 하는데,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베니스 공화국은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따라서 유리를 납품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계약서가 제출되어 있지 않음을 문제 삼아 시간을 지연시킨 이유는 베니스 공화국의 파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던 듯합니다. 안토니오는 상사원으로서 처음 맡은 간단한 임무에 실패하기 직전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조선인이 베니스 상인이 되었다면? 이라는 신선한 상상을 이야기로 꿰어낸 소설입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안토니오가 처음 겪게 되는 시련이 바로 유리 입찰 사건인데, 상인의 관점뿐만 아니라 법률가의 관점에서 들여다보아도 제법 흥미롭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기로 합니다.

베니스 공화국이 파문을 당한 이상 교황청과 직접 거래는 불가능해졌고, 그 틈을 타 어느새 유리공예 기술이 발전한 피렌체가 교황청과 유리 납품 교섭을 할지 모릅니다. 이대로 포기한 채 베니스로 돌아가면 안토니오의 상사원으로서 경력은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안토니오는 교황청에 요청합니다. “약속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pacta sunt servanda).” 무슨 약속이냐며 어리둥절해하는 교황청에, 안토니오는 보정기한을 말합니다. 베니스가 가계약권자로서 받은 보정기한만큼은 누구도 교황청에 유리를 납품할 수 없음을 확인해달라고 합니다. 교황청은 그 정도는 문제없다며 수긍합니다.

안토니오에게는 25일만이 남아 있기에 곧장 나폴리 왕립공작소로 향해, 이름을 빌려달라 합니다. 그때 나폴리의 법률고문이 묻습니다. “수수료를 지불하고 이름만 빌려달라는 것인가? 아니면 나폴리가 베니스로부터 유리를 산 다음 그것으로 나폴리가 유리 입찰에 참가하라는 것인가?” 안토니오는 전자는 교황청에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후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폴리의 법률고문은 안토니오가 베니스 상사를 대리하여 이와 같은 계약을 체결할 권한이 있는지 검토한다고 합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결국 우여곡절 끝에 나폴리로서도 모험을 하여 베니스로부터 유리를 산 다음 입찰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안토니오는 나폴리가 유리 입찰을 시작으로 로마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음을 강변하며 이번에 나폴리가 반드시 낙찰을 받아야하므로 아무런 커미션 없이 입찰가를 원가로 써낼 것을 설득합니다. 고민 끝에 나폴리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입찰가를 원가로 써내어, 피렌체를 이기고 낙찰을 받게 됩니다.

소설의 해당 이야기에서 생각해 볼 법적 쟁점은, 안토니오가 주장한 ‘가계약의 법적 성격’, 나폴리의 법률고문이 의문을 제기한 ‘안토니오의 대리권 범위’ 및 유리 입찰의 ‘계약당사자 확정’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법적 쟁점을 조합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새삼 깨닫습니다. 판례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 같기도 합니다.

지방자치단체가 토지와 건물을 ‘현상태대로 매각한다.’는 취지의 입찰공고를 합니다. 원고가 최고가로 입찰하여 결정했는데, 아직 계약서는 작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원고에게 ‘매각대상 토지 중 도로를 일반인에게 무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계약서 조항으로 삽입하자고 하지만 원고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지방자치단체는 매매계약 체결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입찰을 취소합니다. 판례는 이러한 사안에서 그러한 취소는 무효라고 판단합니다. 이미 입찰공고 당시 최고가 입찰로 당사자 의사가 합치되었으므로 ‘현상태대로의 매각’이 아닌 ‘현상태대로의 사용’을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대법원 2005다41603 판결).

위 판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이제 판례에 살을 덧붙여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경영 부진으로 벼랑 끝에 서 마지막 기회라며 무리하게 입찰에 참가한 원고,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의 계약서 조항 삽입 요청이 거듭되는 상황, 포기를 권유하는 제3자의 말에 흔들리는 원고, 마음을 정하기 위해 침잠에 빠진 원고,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계약서 조항을 삽입하려고 하는데, 원고가 매매계약 체결기한을 착각하는 바람에 이미 기한이 지나버린 상황, 모든 것을 체념한 원고에게 밝혀지는 판례의 법리, 그리고 맞는 기사회생.

단정한 판례의 문장을 접할 때, 만약에라는 가정, 어째서라는 의문, 이럼 어떨까라는 상상 등을 덧대어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판례가 더욱 요긴하고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판례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