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중국의 예외주의는 정말 예외적일까?

2020-11-19     신희섭
신희섭

중국에 대한 재미있는 주장을 보았다. 『하버드 대학 중국 특강』이란 책에서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가르치는 앨러스테어 존스턴(Alastair Johnston)은 중국인들이 평화적이라고 믿는 현상이 대단히 수사적이며, 실제로는 중국인들을 더 호전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해석하자면, 중국인들은 평화적이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군사력 사용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예외주의(exceptionalism)’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좀 다르다는 인식이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인식과 행동의 불일치.

존스턴의 주장은 이렇다. 대체로 중국인들은 ‘중국인은 평화적이다.’라는 주장을 믿는다. 논어는 ‘화위귀(和爲貴)’를 말한다.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책들에서 강조하는 ‘중국인이 평화롭다’라는 주장은 실증적으로는 꼭 타당한 것은 아니다.

2015년 베이징 대학 현대 중국 연구소의 여론 조사는 이 주장을 잘 입증한다. 여론 조사에서 나선 중국인들은 ‘중국인이 평화적’이라고 믿을수록 일본과 미국을 덜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들에 대한 내부 편향성(쉽게 말하면 우리 의식)이 강할수록 외부에 대한 부정적 편향성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같은 여론 조사에서 ‘중국인이 평화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일수록 정책에 있어서 ‘군비확대’를 ‘군비축소’보다 선호했다. 또한, 이 여론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은 평화적이고 일본인은 호전적’이라는 믿음이 강할수록 군비확대정책을 군비축소나 군비유지보다 선호했다.

존스턴은 ‘중국평화론’의 실체를 통해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중국인이 평화적이라고 스스로 믿을수록 실제 분쟁과 갈등의 원인을 주로 타국에 돌린다. 자신은 평화적인 데 비해 타국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더 강력하게 믿게 만든다. 이러한 확증편향은 다른 국가들이 중국을 오만하고 위선적인 국가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타국이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을 무시하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자국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확증편향의 자기 완결.

『Cultural Realism』을 통해서 중국의 전략문화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던 존스턴의 이번 주장은 중국의 정체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대외정책을 분석하는 또 한 가지 논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정체성과 그에 기초한 대외정책이 그렇게 평화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중국인 전체나 중국 지도부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국이 처한 상황과 힘의 관계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중국이 대외정책을 공세적으로 하게 만들거나 파렴치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스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충분하다. 특히 중국은 다르다고 하는 ‘예외주의’가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만들어지는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중국이 평화적이라는 주장은 중국지도부가 강력하게 밀고 있다. 중국지도부는 이러한 평화주의 논리를 통해 중국이 대외정책에서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도 미국과 같은 국가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을 중국인들에게 설득한다. 한편으로 이렇게 대외관계의 갈등과 분쟁으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중국 정부의 국내정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물타기를 하고자 한다.

그러면 예외주의에 기초한 ‘평화주의’의 관심전환정책은 먹히나? 먹힌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중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잘 먹힌다. 2015년 한 언론 매체는 중국이 평화적이고 책임감을 가진 국가인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였다. 중국인의 6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8%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즉 중국 일반 대중에게는 중국 정부의 구호가 잘 먹히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 선진국의 일반 대중에게는 반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 예외주의’는 중국식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한족 중심의 ‘중화민족주의’가 중국을 다른 선진국들과 동떨어진 인식구조에 머물게 한다. 그런데 중국인 중에 유학이나 해외 관광 등을 통해 다른 선진국과의 문화적 접촉의 경험이 있는 이들일수록 중국 정부의 ‘평화주의’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정부의 예외주의는 폐쇄적인 조건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자신들이 좀 독특하다’라는 마취제를 통해 객관적 현실 인식을 거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외주의는 중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미국만이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라는 특별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영국도 프랑스 혁명 시기 에드먼드 버크 같은 사상가를 통해서 영국전통을 자랑하는 보수주의를 제시하였다. 일본도 근대국가를 만들면서 천황에 의한 독특한 국가라는 논리를 만들었다. 한국도 홍익인간이나 선비문화와 같은 문화적 자산을 들어 문화 우월성과 자부심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국의 예외주의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은 예외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편성도 가르친다. 다원화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지도부는 아직 이러한 다원화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중국 예외주의를 예외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원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국력이 증가하고 있는 중국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특별함과 보편성의 조화.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참 어려운 것이다.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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