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열정(fervor)’으로 미친 사람들

2020-08-21     신희섭
신희섭

소소한 이야기 하나 하겠다. 개인적으로 유럽 맥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향이 강하고, 크림이 많아 배가 부른 데다 결정적으로 과하게 비싼 경우가 많다. 한 잔에 8천 원에서 만 원씩 하는 맥주는 여러 잔 마시기 부담스럽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유럽 맥줏집에 방문한 뒤에 그 집에 빠졌다. ‘필스너 하우스’라는 체코 맥주를 파는 곳인데 한번 들린 후 계속 가고 있다. 한마디로 “꽂혔다.” 이렇게 빠지게 된 계기는 엄청 단순하다. 저녁 식사 후 다음 장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집에서 너무 특이한 메뉴를 발견한 것이다. ‘야채 스틱.’

‘야채 스틱’은 좀 생소할 것이다. 당근, 파세리와 같은 질감이 있는 야채를 치즈스틱과 함께 내주는 것이다. 예전 포장마차에서 내주던 오이와 당근의 기본 찬과 유사한데 종류가 좀 더 많고 꼬치에 끼워져서 나오는 것이 좀 다르다. “애걔. 그게 뭐야?” 할 수 있다.

그런데 술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안다. 배가 부른데 술은 마셔야겠고, 안주는 필요하고, 과한 안주는 부담되고, 그런데 또 안주 기능은 안주 기능대로 해야 하고. 이 복잡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의 예술에 가까운 이 조건을 맞추는 데 ‘야채 스틱’만한 것이 없다. 야채 스틱은 이런 안주의 본질에 충실하다. 첫째, 씹을 수 있다. 둘째, 포만감을 주지는 않는다. 셋째, 안주를 먹으면서 건강에 대한 일종의 변명거리를 준다. 넷째. 맛이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술을 부른다.

그런데 이런 안주를 메뉴로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가게의 주인은 어떤 내공을 가졌단 말인가!

주인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맥주를 마셔보았다. 장사가 잘되는 집이라 맥주의 청량감이 좋다. 그런데 메뉴판에 적힌 가격에 또 한 번 놀랬다. 동네 호프집 생맥주 가격 수준이다.

인상적인 기억을 가지고 다음에 다시 방문했을 때 더 놀란 일이 생겼다. 추천을 받아 마신 맥주 때문이다. 그 맥주의 이름은 ‘코젤다크시나몬.’ 코젤이라는 흑맥주에다 컵 주변에 시나몬 가루를 뿌린 이 맥주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특이한 맥주 몇 잔을 마시면서 나는 자연히 이 집에 빠져들었다.

생각해보면 다시 어딘가를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떤 곳은 조만간 다시 방문하고 싶은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든다. 무엇이 다시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가장 단순하게는 ‘매력(attraction)’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이 글은 매력의 다양한 측면이나 이론적 요소를 분석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매력 중 하나인 열정(fervor)을 이야기하려 한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과거 한국 농구의 신화를 이끈 현주엽 선수를 보게 되었다. 과거 선수 시절에도 덩크슛으로 농구 백보드를 부수었던 전설을 가진 현주엽 선수가 최근 먹방으로 다시 전설을 만들고 있다. 1박 2일 동안 먹는 프로그램에서 60인분 이상을 먹기도 하고, 5kg이 넘는 소고기를 한 끼에 먹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뭐 많이 먹는 것이 대수겠나 싶겠지만, 많은 시청자가 그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그가 먹는 것 자체를 ‘열정적’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고 하는 이는 언제나 멋지다. 등 떠밀리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열정을 가지고 미친 듯이” 하는 일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한 개인이 열정을 가지고 하는 일은 멋지고 아름답다면, 그 일이 다른 누군가와 사회에 유용한 일이라면 그것은 숭고할 수 있다. 한국의 잠수함사업이 그렇다. 1987년 독일과 잠수함사업 계약을 할 때 한국은 잠수함 한 척만 독일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만들겠다는 특이한 계약을 했다. 처음 잠수함을 만들던 우리 기술자들은 “누군가는 미쳐야 한다며” 지독하게 독일 기술을 배웠다. 그 결과 1994년 한국은 처음 우리 손으로 잠수함을 만들게 되었다. 독일이 잠수함을 수출한 13개국 중 한국은 유일하게 자체 건조기술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국 해군은 독일잠수함을 운영하며 다른 국가들이 발견하지 못한 공기공급방식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유일하게 대한민국 해군만 독일잠수함의 공기정화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해군이 100시간 이상의 최대 잠항 시간까지 끈질기게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기술자들과 해군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기에 현재 한국의 잠수함 전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열정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모두. 그리고 그 미친 듯한 열정이 공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때 자신과 주변 이들은 모두 고양(uprising)된다. 그렇다. 그렇게 해서 열정은 멋진 일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만든다. 엄청난 역사적 현장에서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도 그렇다.

미친 듯한 열정은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내 자신이 어떤가를 돌아보게 된다.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 『일상이 정치』 저자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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