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의 추억

2006-08-11     오영근

무협소설의 추억


오영근 교수·한양대 법과대학

 

김용의 '영웅문'이라는 무협소설이 유명하던 시절 여름방학 동안 삼국지와 수십종의 무협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고, 게다가 몇가지 교훈도 얻었다.


첫 번째 교훈은 복수는 허무하다는 것이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부모나 스승에게는 잘못이 없고, 원수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며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다. 그러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부모나 스승에게도 악이 있고, 원수에게도 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에게 선악은 상대적이므로 복수가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결국 복수를 단념하게 된다.


인생에 보람있고 즐거운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복수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하고도 어리석은 일이다. 복수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대로 행동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성질 죽이고 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성질을 죽여야 하는 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형벌의 목적을 응보, 일반예방, 특별예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예방과 특별예방이 형벌의 목적이 될 수 있지만, 응보가 형벌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복수라는 감정적인 목표를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환자를 수술하는 의사의 목표는 환자의 건강회복이다. 수술의 고통은 그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목표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일반예방이나 특별예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응보는 인정될 수 있어도 응보 그 자체가 형벌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일반예방과 특별예방이 형벌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어느 하나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특별예방의 목적만을 위해 일반예방의 목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비자금조성으로 유죄가 인정된 재벌회장이 자신의 과오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하더라도, 형벌을 면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예방의 목적을 달성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일반예방의 목적을 달성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예방의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예방의 목적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사형제도의 존폐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형제도는 일반예방의 목적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응보적 수단을 동원한다. 범죄인을 교화하여 정상인으로 사회에 복귀시킨다고 하는 가장 고귀한 목표는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에 양민을 수백 명 학살한 12·12 쿠데타의 장본인들이나 KAL기를 폭파하여 수백 명을 살해한 사람도 사형당하지 않은 현실을 보탠다면, 어느 살인자에 대한 사형도 정당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의 두 번째 교훈은 후배들을 신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국지는 제갈공명을 현명한 사람으로, 조조는 제갈공명에 비해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제갈공명보다는 조조가 훨씬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조조는 많은 유능한 신하들을 양성했다. 개인 중심이 아니라 시스템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신하들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조는 제갈공명보다 개인적인 재주는 못했지만 이를 신하와 후배들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하였다. 나 아니어도 된다는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하다가 과로하여 자신과 나라의 명을 재촉했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체제가 굳어진 촉나라는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제갈공명의 개인적 장점들은 자신과 촉나라에 치명적인 독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부하들의 능력을 믿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아집이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국가의 멸망을 초래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미덕을 가졌느냐에 따라 한 사람은 죽어서 통일국가를 남기고, 한 사람은 죽어서 국가의 멸망을 남겼다.


법조인들 중에도 자신들과 같이 유능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법률사무에 종사하도록 해야 나라가 산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에게 후배들이 외친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후배들에게 기회 좀 더 주면 안 되겠니?"(필자주: 어감을 살리기 위해 존대말을 생략하였음).

 

/본 칼럼은 대한변협신문(제164호) '법률시평'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