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184 / 감정평가 기피 사유

2019-11-15     이용훈
이용훈 감정평가사<br>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에 나와 있는 감정평가사의 직무는 ‘타인의 의뢰를 받아 토지등을 감정평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뢰받으면 지체 없이 감정평가를 실시한 후 감정평가 의뢰인에게 감정평가서를 발급하여야 한다. 또 업무를 수행할 때 품위를 유지하고 신의와 성실로써 공정하게 감정평가 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규정이 적용되는 반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의뢰자의 감정평가 요구에 부작위로 답할 수 없는 독특한 직종이다.

그런데, 평가 의뢰 받으면 난감함이 교차할 때가 간혹 있다. 적은 보수 때문일까? 아니면 가성비로 판단해 탐탁지 않아서일까? 이도저도 아니고, 솔직히 자신이 없어서다. 자료도 없고 무엇이 정확한 몸값인지 가늠이 안 되는데, 규정이 그러해서 지체 없이 답을 줘야 한다면, 어느 누가 가벼운 마음이겠는가. 비중으로 치면 의뢰물건 중 약 1-2% 될 듯하다.

예컨대 사용연한이 지난 컴퓨터 주변기기가 있다. 회계 상으로는 상각이 완료됐으므로 잔존가치율을 적용하지 않았으면 장부가액은 이미 ‘0원’이다. 그런데 아무 불편 없이 사용하고 있으면 사용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다른 설비와 함께 이 기기를 매각하게 된 상황에서 매각가액 평가를 한다면 자신 있는 답이 있을까?

상당기간 광고주를 찾지 못한 빌딩 옥상 광고탑은 어떤가? 거기에 회사명을 광고할 광고주는 얼마의 임대료를 준다고 판단해야 할까? 광고대행사에서 책정한 광고료는 있지만 광고물 제작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에 따라 부르는 광고료는 출렁이고, 공실기간과 계약기간에 따라 실제 계약 임대료가 2-30% 조정될 수 있다면, 수렴할 값을 찾는 것이 고역이다. 우리 법에서는 방매가격을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임대사례비교법이든 적산법을 적용해 시장임대료를 결정해야 하므로, 기법 적용의 기술적인 제약도 부담이다.

중고설비의 인수 이력은 회사에 잘 남아 있지 않다. 인수 당시 중고설비의 최초 취득년도나 취득가격 자료도 공백이다. 그런 설비가 범용성도 없다면, 중고설비의 인수가격이 적정했는지 시장에서 증빙자료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중고 상태의 인수가격 뿐. 현재는 고철 덩어리인지 여전히 쓸 만한 중고설비인지 감정평가사가 잠깐 관찰해서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지끈지끈하다.

영업이익 한 푼 없는 골프장이면 애물단지 아닐까 싶어도 조성비용 상당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현상을 보면, 돈 벌자고 골프장을 매입하는 것만도 아니다. 안 남아도 보유 자체로 회사의 명성이 쌓이고 상당한 홍보효과가 있으면 자기 과시목적으로 골프장을 사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테마파크 놀이시설은 딴판이다. 장사 안 되는 상황이 같다면, 부지조성과 시설비로 들어간 천문학적인 액수는 역사적인 숫자로 사라지고, 오직 영업이익 수준에 걸맞게 몸값이 곤두박질친다. 여기서는 회사 홍보효과나 자기 과시가 설명력이 떨어진다.

이렇게 명쾌하지 않아서 답답하지만 반대로 감정평가사의 자신 없는 결과물이 틀렸다고 지적할 수도 없는 애매함이 있어 그나마 안도가 된다. 물건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소송감정인에게서 발견하곤 한다. 권리금, 상표권, 비상장주식, 일조권침해액, 개발이익 등등. 누구라도, 종가제에 따른 보수 산정은 불합리하고 투입인건비 상당액을 그들의 감정평가 업무 대가로 지급하는 것에 이의 없는 물건, 감정평가 기피 물건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고 그래서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이용훈 감정평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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