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업 변호사의 법과정치(92)-노동의 종말과 인권의 진보

2018-12-21     강신업











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은 우리 산업현장이 얼마나 후진적인지를 날 것 그대로 보여 준다. 그것은 비단 위험한 일을 원청업체가 외주 하청업체에 맡겼다고 해서가 아니고, 2인1조로 해야 할 업무를 1인에게 맡겼다고 해서만도 아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전력생산 공기업이 자칫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일을 왜 그렇게 원시적인 상태로 방치했느냐 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기간산업이라고 하는 발전소의 기계화, 자동화 실태가 고작 그것밖에 안되느냐 하는 것이다. 흔히들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을 하는데 정작 문제는 ‘위험의 상시화’다.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진짜 문제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가 쓴 <노동의 종말>에서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피곤도 모르고 임금도 필요 없는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빼앗고 있다며 노동의 종말이 과연 인간을 천국의 유토피아로 안내할지 의문이라고 적었다. 여기서 제레미 리프킨이 진단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데서 비롯되는 인간의 암울한 미래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 류의 진단이 옳지 않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지 오래다. 가령 자동차의 발명은 그것을 생산하는 일자리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도로건설, 유통, 관광 등 과거에 없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은 건설이나 토목 등의 일자리를 없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도로와 터널 등의 건설을 가능케 하여 관련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교통의 발달을 통한 물류 이동 등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사실 기술진보는 생산방법을 바꾸고 대량생산과 대량고용을 늘렸다.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 새로운 생산방법이 도입되고 대량생산 체제가 일반화되면서 대규모 제조업 중심의 고용관계가 형성되었다. 노동자들은 드디어 일정한 곳에서 정년을 보장받고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안정적이고 높은 소득을 얻는 노동자 계층이 증가하면서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이것은 다시 생산과 고용증가로 이어졌다.

물론 아직도 기술의 발달에 비관적인 사람들은 로봇이나 AI가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심지어 인류의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AI 기술을 악용할 것이라는 점도 그들이 내세우는 걱정거리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인해 로봇이 인간을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상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실 기술의 개발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제도의 정립과 관련된 문제다.

오히려 오늘 김용균 씨 사망사태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문제는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체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김용균씨 이전에도 수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작업 중 죽거나 다쳤다. 이미 위험이 상시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무슨 배짱인지 태안화력발전소는 생명과 신체를 담보로 해야 하는 작업을 미숙련 노동자에게 맡겨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인권유린이다. 꼭 고문을 가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것만이 인권유린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악의 인권유린이다. 적어도 이 시점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종말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고되고 위험한 극한 작업은 가능한 빨리 기계에게, 로봇에게, AI에게 맡겨져야 한다.

노동의 종말이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가져올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극한노동, 위험한 노동의 종말이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점은 확언할 수 있다. 위험이 따르는 극한노동을 기계화, 자동화하는 것은 아무리 서둘러도 오히려 늦은 것이다. 다시는 대한민국에서 ‘인간을 위한 노동’이 ‘노동을 위한 인간’으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