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 (5)

2018-10-02     신희석











신희석 박사
전환기정의워킹그룹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제형사재판소(ICC) 침략범죄 개정안의 조속한 비준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통치권을 빼앗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는 이 날을 경술 국치일이라 부른다. 이후 일제는 35년간 한반도를 통치했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쓰라린 경험이 아니다.

오늘날 주권국가에 대한 이와 같은 노골적 침략행위는 상상하기 어렵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무력사용 및 위협은 국제법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98년 로마규정에 따라 2002년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한 발 더 나아가 침략범죄(crime of aggression)의 정의를 채택하고, 이를 처벌할 권한을 확보했다.

국제법에서 명시적으로 전쟁 자체를 규제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전쟁에 대한 법(jus ad bellum), 즉 전쟁 개시 자체의 규제는 현실정치 속에서 어려웠다. 그래서 국제법은 19세기 말부터 전시의 법(jus in bello), 즉 전쟁 수행 중 부상병, 포로나 민간인의 대우 등부터 규정하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총동원전에 따른 전후방 구분이 없는 참상은 전쟁 자체를 금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된 1928년 파리 부전조약(켈로그-브리앙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의 국제군사재판소는 침략전쟁을 모의·실행한 독일과 일본의 전시 지도자에 대해 “평화에 반한 죄”로 유죄를 선고했고, 두 나라는 전후 조약에서 이러한 판결을 수락했다. 1945년 유엔헌장은 자위권 행사 및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행동을 제외한 무력 사용 및 위협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한편, 냉전 후 국제정치의 모멘텀 속에 1998년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관한 로마규정은 침략범죄를 관할범죄(제5조)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로마규정에 가입했다.

그런데 기존 로마규정은 침략범죄의 정의와 관할권행사 요건이 없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침략전쟁’이었냐는 질문에 과거 국제법상 침략의 정의가 없었다고 답한 것에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물론 이런 형식적 법률만능주의에는 무리가 따른다. 역시 확립된 정의가 없기 때문에 1995년 옴진리교의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살포도 ‘테러’가 아니고, 1948년 제노사이드협약이 채택되기 전에 벌어진 나치의 600만 유대인 학살도 ‘제노사이드’라 할 수 없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될 테니 말이다.

다행히 지난 2010년 6월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로마규정 재검토회의에서 한국을 비롯한 ICC 회원국들은 침략범죄 관련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이 사상 최초로 구체적인 침략범죄의 정의에 합의한 것이다.

‘침략’의 정의는 단순히 법조인의 관념적 안주거리가 아니다. ‘타국 영토의 병합’, ‘타국 영역에 대한 폭격·무기사용’, ‘타국 군대에 대한 공격’, ‘타국의 제3국 침략행위에 자국 영역의 사용을 허용하는 행위’ 같은 객관적 정의는 침략의 정당화를 어렵게 한다.

강대국들이 침략범죄의 정의 채택에 소극적이고, 로마규정에서 이 문제가 난항을 겪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까지 개정안의 35개 비준국 중 독일을 빼면 폴란드, 벨기에, 키프로스, 조지아, 사모아 등 과거 강대국의 침략을 겪었던 중소국이 대부분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난 2017년 12월 ICC 회원국들은 한 발 더 나아가 ICC에 침략범죄 개정안의 비준국 국민 및 비준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진 행위에 대하여 침략범죄 관할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는 소급효가 없고, 앞으로 침략 책임자가 실제 처벌될 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헌법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을 규율하는 국제법은 정당한 국가행위와 부당한 국가행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때문에 전세계 123개국이 가입한 ICC에서 정의한 침략범죄를 저지르면, 인류 공공의 적으로서 세계여론의 재판을 피할 수 없다.

침략범죄 개정안의 비준국은 이행 입법을 통하여 국내법상으로도 침략을 범죄로 규정하여야 한다. 1998년 영국 외유 중에 20여 년 전 국내 반체제 인사들의 고문으로 돌연 체포된 칠레의 독재자 피노셰(Pinochet) 같은 사례가 재연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며,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는 침략죄 처벌에 중요한 국익이 걸려있다.

지구상에는 10년 넘게 계속되는 이라크의 참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개입,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전쟁이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기존 맹주인 미국과 빠르게 부상 중인 중국간 긴장관계 속에서 퇴행적 역사관을 고수하는 일본 우익세력이 평화헌법을 뒤엎으려 하고 있으며, 북한 리스크는 해소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개정안 조기 비준과 이행입법을 통한 침략범죄 정의의 확립과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한 처벌은 한국의 안정보장뿐만 아니라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기반 구축에도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