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교폭력의 유전무죄

2017-10-20     엄상익

 

 

 

 






엄상익 변호사/소설가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다. 한 아이가 맞아 죽었다. 할머니와 같이 살던 결손가정의 아이였다. 가해자는 명사 집 아들이었다. 가해자인 아이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아이는 전혀 죄책감이 없었다.

자기의 주먹 한방에 상대방 아이가 쓰러져 죽더라고 자랑기 섞인 말을 했다. 가해자의 부모는 아들의 장래만을 걱정했다. 사랑과 헌신으로 알려진 명사 부모인데도 그랬다.

그들을 보면서 아득한 기억 저쪽에 숨어있던 나의 중학시절을 떠올렸다. 중학시절 나는 학교에서 칼을 맞은 적이 있다. 재벌 집 아들이던 가해자는 주먹 쓰는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보스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타켓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굴을 수십 바늘 꿰맨 중상이었다.

칼이 경동맥을 지났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학생에 대한 징계는 교직원회의에서 배심제 같이 판단했다.

피해자였던 나는 가해자와 똑같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같이 싸웠다는 명분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 한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보자고 하더니 뇌물을 받고 양심에 위반된 일을 했다고 고백했다.

재벌회장인 그 아이의 부모가 전 교직원을 일급호텔에서 잘 먹이고 많은 돈을 주었다는 것이다. 가해자인 아이의 담임선생도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자기는 다른 선생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았는데 정말 미안하다는 것이다.

칼에 맞은 상처보다 학교의 공정하지 못한 처리가 나의 영혼에 더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학교 내에서도 유전무죄가 있었다. 그 사건은 반면교사로 내게 정의 관념을 알게 했다. 법대를 가고 변호사가 됐다. 소년시절의 불공정 체험은 사건마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한번쯤은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자극제가 됐다.

사건기록에서 죽은 아이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게 소년시절의 나일수도 있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사진 속에서 죽은 아이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나는 가해자인 아이와 그 엄마에게 죽은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렇게 죽은 아이에 대해 미안하지 않니?” 가해자인 아이와 그 엄마는 멈칫했다. 그 엄마에게 내가 덧붙였다.

“죽은 이 아이도 누군가의 귀한 아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 아이는 미래가 모두 없어진 거 아닙니까?” 모자의 얼굴이 그제야 숙연해 졌다. 내가 계속했다.

“남을 죽였으면 자기도 죽어야 하는 게 원래 법의 응보라는 원칙이고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모자가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무릎을 꿇고 진정으로 참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모자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학교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가 오래됐다. 아이모습을 한 탈을 썼지만 잔인성을 보면 그 뒤에서 악마가 웃고 있다. 자기자식 밖에 안 보이는 부모의 이기주의와 교사의 책임회피로 교육의 징계권은 무력하다. 미성년자라는 명분의 솜방망이 처벌은 도덕불감증의 사회를 만들고 있다.

새로운 악이 번성하고 있다. 돈을 주면 가해학생을 대신 가서 때려주고 그 부모의 직장에까지 가서 행패를 부리는 청부업자들의 활동이다.

교편(敎鞭)이란 말이 있다. 학교의 징계권이 바로 서야 한다. 학교에서부터 정의가 뼈에 박히게 해야 법치사회의 민주시민을 만들 수 있다. 정의가 빠진 교육은 공부 잘하는 쓰레기만 양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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