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9)-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간회

2017-08-29     이유진

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춘원 이광수는 최초의 근대 소설 <무정>의 작가로서,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문화운동으로 민중을 계몽하려 한 실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통해 민족에 대한 그의 관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 “그리하려면?” /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 “어떻게요?” / “교육으로, 실행으로.”
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논의한다. 형식은 한 번 더,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였다. “우리가 하지요!” 하는 대답이 기약하지 아니하고 세 처녀의 입에서 떨어진다. 네 사람의 눈앞에는 불길이 번쩍하는 듯하였다. 마치 큰 지진이 있어서 온 땅이 떨리는 듯하였다.
- 이광수, <무정> 中

당시 <무정>은 무력감에 빠져 있던 조선의 청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 <그 여자네 집>에서 ‘춘원의 책이 젊은이들 사이를 돌며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혔다.’고도 했죠. 이렇게 당시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광수는 1922년,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조선의 민족적 위기는 일제의 식민 지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민족성 자체가 타락했기 때문에 민족적 위기가 온 것이며, 일제의 식민 지배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민족해방운동은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했죠.

그가 중국 유학생이던 시절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는 분명 ‘변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꼈겠죠. 하지만 저는 오히려 <민족개조론>과 그 후 그의 행적이 오히려 이광수의 본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지만 부끄러워했으며, 연민했지만 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정>에 드러나는 시혜(施惠)적(?)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신과 일부 지식인을 위에 놓고 조선의 인민들은 무지몽매한 존재들이니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고 발밑에 두는 태도를 보였죠.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것도 그 자신이 독립의 필요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하고 존경하던 지식인들에게 경도되었던 탓이 컸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의 민족개조론은 모델을 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결국 조선인임을 망각하거나 포기하여 일본인과 하나가 되자는 주장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광수의 이런 주장은 일제의 문화통치로 조선인의 활동이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된 만큼, 그 안에서 참정권을 획득하여 정치적으로 실력을 양성하자는 ‘자치론’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민족주의자들 중에 실력자들을 포섭하여 조선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자치론’을 거부하고 일본에 의한 민족 해방이 제1목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들이 ‘타협’과 ‘비타협’으로 나뉘어 갈등할 때, 사회주의자들로 이루어진 독립 운동 세력도 성장했습니다. 1918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는 약소국의 민족해방을 도울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물론 이는 자국에 불리했던 전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약소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을 비판하는 의식에 출발했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이는 곧 독립 투쟁과 연결되었습니다. 일본은 이에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하였습니다. 조선 내 사회 안정을 명목으로 사회주의와 독립 운동을 동시에 제압하고자 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민족 협동 전선론’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민족해방’을 위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서로 다른 이념과 목적을 잠시 미루고 협동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통해 서로의 역량을 확인한 두 세력은 같은 해 ‘정우회 선언’을 통해 민족해방과 비타협적 성격을 공유하며 서로 협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였습니다. 신간(新幹)은 ‘신간출고목(新幹出古木, 고목에서 새 가지가 솟아난다)’에서 따온 말이었습니다.

신간회는 1920년대 가장 전국적이고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였으며, 당시 독립운동의 양 세력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시도한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실이었습니다. 신간회는 1929년 원산 총파업을 지원했으며, 광주 학생 운동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여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는 1928년과 1929년 정기대회를 허가하지 않는 등 이들의 활동을 막으려 들었습니다.

신간회는 공개적 단체였기 때문에, 총독부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내부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간의 갈등도 생겨났습니다. 1929년 허헌 등 민족주의 좌파가 광주학생항일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단독으로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 한 것은 신간회 내 사회주의자들의 불신을 키웠죠.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간회의 중심세력이 점차 민족주의자들로 채워지고, 급기야 온건적이고 합법적인 ‘타협적’ 방법을 지향하게 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기 어려워졌습니다.1)

1920년대 후반 노동, 농민운동이 격화되면서, 소련도 이제 사회주의만의 독자적 사회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소련의 판단 하에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테제’, 즉 민족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신간회는 1931년 ‘해소’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간회의 활동은 4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3·1운동 이후 분화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해방’이란 목표 아래 연합했다는 점은 감격스러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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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 한국사연구회, 지식산업사
    이경훈, 『이광수의 친일문학 연구』, 태학사, 1998년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솔,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