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설립한 이소아 변호사

2017-01-05     김주미 기자

광주전남 유일 공익전업변호사 상근 비영리단체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면 이상이 현실될 것”
“약자의 목소리를 법의 언어로 전달하고파”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자신을 변호사이자 활동가라고 소개하는 여성이 있다. 현장이 좋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때부터 줄곧 NGO단체 상근변호사로 일해 왔다는 이소아 변호사는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성매매 피해 여성을 위한 다시함께센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상근변호사를 거쳐 올해로 9년차 변호사가 됐다.

개인 사정으로 2년 간의 민변 상근 변호사로서의 활동을 접고 광주로 내려갔던 그녀는 법무법인 해마루 광주분사무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인권이나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녜요. 저는 좀 게으르고 겁이 많거든요. 인권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보다는, 일하는 방식이 저와 잘 맞아 이 길에 계속 있는 것도 같아요”

그녀가 처음 NGO 단체 상근변호사를 하려던 때에 가진 마음은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 그 뿐이었다는 것.

“그래서 처음에는 힘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를 모르고 무작정 덤볐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러 고민과 씨름한 끝에야 그녀는 역설적으로 그 동안에는 몰랐던 자신의 재능과 흥미를 발견하게 됐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뭔가를 조직하고 엮어내는 일을 할 때 그녀는 큰 흥미를 느꼈고, 그 일들은 다른 변호사들에 비해 그녀가 특히 잘 해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급기야 그녀는 광주전남지역 유일의 공익전업변호사가 상근하는 비영리단체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설립하기에 이른다.
 

인권의 도시 광주에 공익전업변호사가 없었다

당초 ‘공익변호사 모임 동행’의 이름으로 시작했던 단체의 명칭은 최종적으로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으로 확정지어졌다.

‘존엄과 권리를 상실한 이들 곁에서, 바라보는 귀 듣는 눈으로 들어, 법의 목소리로 세상에 전달’이라는 구체적이면서 추상적인 지향을 갖고 있는 단체라는 것이 그녀의 말이다.

아울러 변호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법률과 제도 자체로 인권의 벽과 경계를 허물기 위해 전업 변호사로 일할 것을 지향한다고도 한다.

“광주로 내려와서 공익전업변호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인권의 도시 광주인데요.(웃음) 그래서 제가 재밌게 잘 할 수 있는 일, 조직을 만들어 사람을 엮고 활동하는 일을 여기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그녀가 설립한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이 최근 조선대학교 이사장, 광주 경실련 대표 등을 역임했던 김용채 변호사를 새 대표로 맞는다. 이에 따라 이소아 변호사는 ‘초대 대표’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이 지역에서 공익전업변호사를 하고자 하는 후배변호사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려 해요. 그런 생각에서 전남대 리걸클리닉센터랑 업무협약식도 하고 인권법학회연합과 세미나도 하며 접촉면을 넓혀가고 있죠”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덧붙였다. “물론 썩 쉽지만은 않은 일들이에요”

기억에 남는 사건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인지를 묻자 그녀는 ‘여수 유흥주점 여성 사망 사건’을 꼽았다. 성매매알선이 이루어지는 여수의 한 유흥주점 여종업원이 업주의 반복된 폭행 끝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업주로 인해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묻힐 뻔한 일이에요. 업주는 사망한 여성이 응급실에서 술마시고 토하다가 질식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동료 여성 9명이 스스로 여성단체에 신고한 다음, 기나긴 수사과정 및 재판과정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끝까지 해 준 덕분이죠, 그래서 참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 여성들을 존경합니다”

보통 성매매 피해여성들과 관련하여 문제되는 법률적 사안은 대부분 무효인 선불금으로 인한 민형사사건이다.

그러나 한 여성이 탈성매매를 위해 업소를 나와 업주를 성매매알선으로 고소하고 채무부존재확인소송을 제기해도 주변 동료로부터 증언을 얻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이 탈업소를 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계속 일해야 하는 동료들 입장에서는 업주에게 대항해 증언을 하기가 어려운 것.

“그런데 여수 사건은 달랐어요. 사망한 동료를 위해 싸우려는 용기와 의지를 이 9명의 여성들은 꺾지 않았거든요. 수사기관에 네다섯 차례 나가 조사를 받고 재판에서는 2시간 이상 진행되는 증인신문을 받기도 했어요. 업주의 협박과 회유는 계속됐죠”

그녀는 한층 더 강조했다. “제가 말로만 전달해서 그렇지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예요. 여성들이 겪은 생활고, 업주에 대한 두려움, 수사·재판 과정에서 느끼는 압박과 스트레스 등.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여성들은 용기있게 일관된 진술을 했어요. 결국 업주는 구속되고 실형을 받았죠”

기억에 남는 또다른 사건으로는, 근육병을 앓고 있는 뇌병변장애 1급의 50세 장애여성이 장기요양등급을 받았다는 이유로 활동보조서비스신청 자체를 못하고 있는 사건을 들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건인데요. 저희가 사회복지서비스변경신청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대리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이 사건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어머니도 3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후 뇌병변장애를 갖게된 것.

“‘갑자기 장애를 갖게 돼 슬프다’는 식의 단순한 상념이 아니라 장애가 일상이 되는 거거든요. 일상이 일상처럼 가능해야 하는 것... 장애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 바로 그 자신이 된다는 것... 이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녀였다.

갑자기 찾아오는 장애는 사람을 골라서 오지 않는다. 즉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위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애에 관한 지식도, 관심도, 감수성도 태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소아 변호사는 말했다. “이 분은 시와 그림을 사랑해 시화집도 내신 아름다운 분이세요. 장애가 일상이 된 현실과 심경을 담담히 말씀해 주시는데, 저는 이 목소리를 법의 목소리로 잘 전달하고 싶어요”

변호사, 동시에 활동가

“저는 기존의 법조 영역이 아닌 영역에 있는 것이죠” 그녀는 변호사이지만 동시에 활동가이기 때문이다.

양자를 겸하는 것이 기존의 변호사 혹은 기존의 활동가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보통 인권단체가 변호사를 찾을 때는 법률 문제로 소송을 하려 할 때예요. 관련 자료를 가지고 와서 변호사와 상의한 후 그 이후의 법률적 진행은 모두 변호사에게 일임하죠. 그런데 저희는 평소에 인권단체들과 소통하며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법률적 가능성과 법적 관점을 공유합니다”

송무 이외의 방법으로 인권의 경계를 확장하는 활동들, 즉 일반 변호사라면 부수적으로 하는 활동들을 전업으로 삼는 것도 차이점이다.

입법 운동이나 토론회·공청회, 인권 교육이나 인권 매뉴얼 제작 등 법과 활동이 겸하여진 모든 형태들이 ‘변호사이자 활동가’인 그녀를 통해서라면 보다 전문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장난스러운 어투로 그녀가 말했다. “현실적으로 다른 점도 빼놓을 수 없죠. 회계정리, 회원관리, 송무관리, 기록열람복사 등등 일반 변호사라면 직원들을 통해 하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모두 직접 하지요”

그래도 역시 변호사로서 가장 기뻤던 일은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을 만들었을 때와 후원 회원이 160명을 넘었을 때라고 그녀는 말한다.

공익변호사의 생각, 그리고 포부

말로만 듣고 글로만 배웠던 것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으면 이전에 알던 것과 분명한 괴리를 느끼게 된다. 이 변호사 역시 그런 괴리감에 부딪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권리 보호를 이뤄야 할 문제로는 ‘평등권’을 들었다. 인권의 출발이자 기본이 되는 평등권 보장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 되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

“평등하다는 건 모든 존재가 동등함을 인정하고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쉽게 비장애인, 남성,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 성인, 이성애자 등 기존의 편견과 틀 안에 있는 존재만 같다고 인식하고 그 존재를 존재로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 장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아동, 노인 등 약자로 범주화되는 사람들에 대해 차별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오히려 당연시 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장애와 빈곤에 대한 인식도 꼬집었다. “사회적 기본권은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지원을 ‘해 준다’고 여기죠. 장애와 빈곤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합당한 권리를 누리려면 내가 얼마나 비참하고 어려운 지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해요. 마땅히 주어져야 할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런 시스템은 정말 문제인 거죠”

국가가 헌법 제10조에 규정된 당연한 책무를 이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한테 시혜적으로 지원을 해 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보니 매번 재정을 문제로 미루고 회피하는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인권의 문제에 타협이나 양보는 있을 수 없죠. 인권의 대전제가 불가분성, 불가양성, 보편성 아닌가요?”

앞으로의 포부를 묻자 이 변호사는 “단기적인 목표로 활동가를 겸하려는 후배 변호사를 위한 실무매뉴얼을 제작하려 한다”고 말했다. 다른 공익변호사들과 함께 진행할 예정으로 늦어도 올 하반기에는 나올 계획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현재 일하고 있는 광주에서 후배 변호사를 5명까지 영입, 여러 단체들에 공익전업변호사를 파견하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이에는 후원 모금이 상당히 중요하다.

“단체의 경영을 투명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늘 하는 고민이에요. 비영리 경영과 관련한 회계, 세무 분야의 책도 찾아보고 자문도 구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알음알음 주먹구구식이지만 이렇게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공익전업변호사 비영리단체 조직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주변으로부터 이상주의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이소아 변호사. 그러나 그녀가 가진 행동하는 손과 발은 단순히 가진 이상을 말 혹은 생각에만 머무르게 하는 여타의 이상주의자들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하고자 하는 일을 서로 같이, 함께 고민하며 하나씩 직접 만들어가다 보면 이상도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저처럼 방황이 길어지지 않게 ‘진짜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되도록 일찍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남긴 애정어린 조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