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공유, 리더십의 본질을 향하여

2015-09-18     신희섭

 

 

 

 

 


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한화고등학교.’ 프로야구팬들에게는 유명한 단어일 것이다. 한화야구단을 이끌고 있는 김성근감독과 김 감독을 따르면서 야구를 하고 있는 프로야구선수들을 빗댄 표현이다. ‘프로’라고 한다면 그 분야 전문가로서 자신이 알아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일 텐데 성인프로야구선수들이 마치 고등학교선수들처럼 감독에 의해서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김성근감독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그럴 것이다. 성과를 지향하고 단지 성과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성과지향성을 문제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그 반대편에는 야구라는 경기를 넘어서 성인들이 하는 일에 지나친 관여와 지시는 개인의 자율성과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비판이 있을 것이다. 프로가 지향하는 승리와 성과를 위해서 개인보다는 조직을 강조하는 점 역시 조직이 먼저인가 개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조직을 만드는가를 두고 날선 대립이 있기 마련이다. 노(老)감독의 지치지 않은 열정과 그 열정과 성공가능성에 대한 선수들의 믿음과 만년 최하위를 만들었던 플레이스타일을 바꾼 성과는 김성근감독에 대한 객관적 평가이전에 사뭇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김성근감독의 야구스타일과 철학은 프로야구를 떠나 리더십이라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들기 충분하다.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와 조직운영을 위해서 과연 조직구성원을 어떤 방식으로 독려하면서 이들의 에너지를 모아 개인에서 조직으로 이전시킬 것인지는 야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직에 속하는 문제이다.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에도 중요한 일이며 친구임에서도 당연히 중요하다. 돌아보면 과거 친구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이어졌고 얼마나 오래 만나고 있는지를 보면 몇 명의 조직을 관리하는 것 조차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감독이 보여주는 리더십은 과거 김성근감독이 운동을 하던 시절이나 1980년대까지의 일반적 한국스포츠계를 닮아있다. 그것은 확대하면 민주화와 실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사회의 운영방식과도 닮아있다. 그런 점에서 산업화시대 사회운영방식과 김성근감독의 조직운영방식은 데칼코마니이다.

1960년대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을 주도한 사회운영에 대한 신념을 간단히 정리하면 “지도자의 의지와 추진력에 의해서 사회와 조직이 굴러간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확고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합리성에 대해 아랫사람들은, 거칠게 표현하면, 맹목적인 추종을 한다.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과 조직에 대한 초아(beyond-self)적인 헌신 속에 추종자들은 조직전체를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개인적 자아는 전체 조직을 위한 희생을 필요로 하며 조직이 있을 때 자아가 있다는 강렬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산업화시대의 이념이라고 칭하여지는 이 논리를 통해서 전체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김성근감독을 시대의 아이콘이나 시대정신구현으로 과도하게 포장할 생각은 없다. 단지 김성근감독이 보여주는 철학이 산업화시대의 정신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화시대의 운영방식은 독특한가? 그렇지 않다. 한국산업화시대 사회운영철학은 일본 메이지시대철학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메이지시대철학은 프러시아 시대정신을 모방한 것이다. 그럼 “천재적인” 프러시아시대의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발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개체의 특성보다는 집단을 강조하는 발상을 1800년 후반의 후발산업화라는 시대적인 환경변화에 도입한 것이고, 이 발상자체는 루소나 마키아벨리 그리고 멀리는 플라톤에 까지 연결되어 있다.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발상을 ‘완전주의’라고 한다. 완전주의란 신학에서 말하듯 신이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지도자가 공동체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고 구체적인 정책방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이러한 전지전능함을 추종자들은 경외감을 가지고 묵묵히 따르면 되는 것이다. 이 철학적 사조에 민족주의의 우월감을 양념으로 버무리고 과거와 역사에 대한 낭만주의 향수를 살짝 간하여 만든 것이 히틀러의 파시즘이다.

어쩌다보니 김성근 감독의 야구스타일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정치철학의 중요한 주제인 리더십과 완전주의 사고로 이끌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지도자가 뛰어난 지적인 능력과 열정 그리고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헌신을 한다고 해서 과연 추종자들이 지도자를 따라 그들 모두가 바라는 성과를 이루게 될까? 역사 속 수많은 지도자들이 완전주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관철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지만 모든 이들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완전주의의 극단에 절대적인 의미의 독재가 있다. 그런데 독재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추앙받는 리더십과 비난받는 독재사이의 갈림길에서 많은 지도자들은 리더십이라는 어려운 길보다는 독재라는 편한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그 시점에서 그것은 갈림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더 강한 리더십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자신이 변화를 주도하여 이끌어내고 싶다는 사명감과 우월감이 리더가 가는 길을 점차 변형시켰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 많은 지도자들은 리더십에서 전제주의(despotism)로 가게 되었을까? 무엇이 이들을 추종자들과의 상호적 관계에서 자의적 판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관계로 가게 만들었을까? 만약 리더에서 전제적인 지도자로 전락한 이들이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이에 리더십과 독재의 갈림길에서 쉬운 길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의 순간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흥미로운 한 사례를 만났다. 그것은 과거에 영화로 본적이 있었던 고 이태석신부에 관한 사례였다. 강연을 통해서 다시 이태석신부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행운이었다. 강연을 듣는 내내 전에 보았던 영화의 기억으로 계속 눈물이 났다. 2010년 덩시에도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그의 희생적인 삶은 사회적화두가 되었다. 문둥병이라고 하여 사회에서 격리된 한센병환자들의 발을 직접 만지고 이들에게 신발을 만들어주며, 가난하여 희망이 없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악기연주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불러일으켜준 이태석신부의 이야기는 다시 듣는 동안에 온 몸에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의사신분을 내려놓고 성직자가 되기로 한 점이나 전쟁으로 가장 척박한 지역이 된 수단이라는 곳에서 공포와 두려움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공유한 점은 내게는 경외감을 가지게 했다. 어쩌면 따라할 수 없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관객이 되어 볼 수 있는지 모르는 그의 삶은 종교를 넘어선다.

그런데 고 이태석신부의 삶은 리더십의 관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루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낼까? 왜 수단의 톤즈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을까? 왜 한국이나 미국이나 영국에서 이태석신부의 삶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마음이 흔들릴까? 전국의 사찰이나 교회에서 이태석신부의 삶을 보면서 영감을 얻고 그를 추앙할까?

그가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일반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영적인 요인이 리더십의 아우라를 만든 것은 아니다. 흔하지 않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기꺼이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모두 성직자는 아니라는 점에서 종교는 이 리더십의 본질은 아니다. 이들이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권력도 이 리더십의 본질은 아니다. 오히려 권위가 이 리더십을 채우고 있다. 정확하게는 공감(sympathy)이 리더십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권위 혹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어디서 나올까?

이 부분에서 우리는 리더십본질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리더십에는 자기희생과 헌신이 있다는 것이다. 나를 넘어서는 것. 그래서 서슴없이 타인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간섭이 아닌 관여와 배려로 아니 이보다는 공감과 공유로 “같이 삶을 나누는 것.” 리더십의 아름다운 형태로서 ‘공유적리더십.’

‘공유적리더십’을 보면서 우리는 이태석신부와 같이 산 적이 없지만 그 삶에 공감을 하는 것이다. 리더십의 갈림길에서 자기에 대한 확신에 따른 강요보다 타인과의 공감과 공유를 하려는 성찰이 리더를 리더로 지켜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