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나희덕 시인의 “부패의 힘”

2012-06-01     법률저널

 

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나희덕 시인의 시 “부패의 힘”은 이러하다.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새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반칠환의 “뉘도 모를 한때”에 수록, 종려나무 간).


성경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질 때 비로소 60배, 70배의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다고 가르친다. 썩어짐의 긍정적 효과이다. 나희덕 시인은 단단한 철문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녹스는 것, 냄비 속 음식이 썩어지는 것에서, 이 우주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발견하며 안심한다. 부패가 삶의 원천임을 갈파한다. 썩어지는 박테리아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흉측한 세상이 되겠는가? 나희덕 시인은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이라며 깨끗한 척 하는 세상에서, 깨끗한 척 하는 행동을 보이며 살아가는 이들의 위선을 역설적으로 통렬히 야유하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썩어짐은 곰팡내 나는 본질적 부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라져야 할 때 사라질 줄 알고, 스러져야 할 때 스러질 줄 아는 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강자의 지위에 오른 자는 결코 그 강자의 지위를 놓지 않으려 별의별 수단을 쓰고, 방부제를 계속 사용한다. 방부제로 무장한 채 휘황찬란한 진열대에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는 제과점 빵들이 몇날며칠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처럼, 방부제에 익숙해진 자들은 결코 자신이 썩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썩지 않은 척하는 외형을 자랑하고 있다. 반칠한 시인은 위 나 시인의 시에 대하여 “그랬구나, 썩지 않는 철밥통, 녹슬지 않는 철의 권능을 지닌 이들에게서 냄새가 나던 것은 그 때문이었구나, 번쩍거리는 광채가 다름 아닌 구린내였구나. 녹슬 때 녹슬고, 썩을 때 썩는 것이 아름다운 일임을 새삼 알겠다. 다만 미리 녹슬면 ‘내’가 없고, 나중 썩으면 ‘너’를 더럽히니 ‘때’를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촌평하고 있다.


나희덕 시인도 위 시의 말미에서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라고 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시인의 의식은 건강하다. 남들이 다 녹슬어 가는데, 정말 부패하여 녹슬어 가는데 시류에 영합하지 못하고 녹슬지 못하는 시인의 나약한 건강성은 또한 시류에 영합하며 살아남아야겠다며 방부제를 삼키며, 또 썩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신에 불안감을 느끼는 이중적 심리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어찌 보면 시인은 모두 거짓말쟁이인지도 모른다. 가장 지독한 부패가 썩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거짓말이다. 썩지 않는 것이 부패라니, 우리의 일반 상식을 뒤엎는 반란이다. 우리는 여태 썩는 것이 부패하는 것이고, 부패하면 썩는다고 교육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나 시인은 오히려 썩지 않는 것이 부패이고, 썩지 않도록 이 사회 곳곳에 방부제를 주입시키는 사회구조가 진정 썩은 것이라며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러져야 할 때 스러져 사라져야 하는 것이 세상이치인데, 방부제에 익숙한 사회는 외형의 화려함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간혹 글에 언급된 이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하고, 격려를 받기도 한다. 모두 독자의 반응이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은연중 글에 대한 자기검열을 강요당하는 것 같아 굉장히 싫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글에 부정적으로 언급된 이들은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글로 인해 엄청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객관적 사실에, 다시 말해 팩트에 의해 글을 써야 하는, 그리고 그 글이 공익적 정의를 실현하는 가치에 기준을 두고 써야 하는 자기검열이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기보다는 글에 언급되는 이들은 대부분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밝고 어둠의 양면이 있는 것인데, 한쪽면만 지나치게 부각되는 글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기준 잣대는 자기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나희덕 시인의 “부패의 힘”이 상징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나희덕 시인은 말하고 싶어 한다. 아무리 방부제를 많이 써서 외관상 썩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썩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 부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방부제의 효과가 사라지면 그것이야말로 하루아침에 무너질 내릴 썩어짐의 결합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이라고. 제19대국회가 개원되었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선출과 관련하여 내부투표에서 부정부패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결국 통합진보당은 두 개의 비상대책위원회가 가동 중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검찰에 의해 통합진보당의 당원명부가 내장되어 있는 서버가 압수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진보정당의 당원을 파악하여 그들의 진보성향을 파악하고 음으로 양으로 그들을 압박하여 진보정당을 고사시키려는 정치적 탄압수단이라며 진보세력의 반발이 거세다. 우리 헌법은 정당의 자율성을 아주 강하게 보장하고 있다. 헌법 제8조는  정당의 설립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정당의 목적과 조직 및 활동이 민주적으로 운영될 것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정당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기본적으로 정당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사법부를 비롯한 다른 국가기관은 그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 옳다. 즉 정당 내부의 이러한 자율권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당에서 공천된 자들에 대한 국민투표가 정당성을 갖게 되고, 선출된 그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그들의 국민의 대표가 되어 참여하는 국회가 자율권을 보장받게 되어 행정부나 사법부로부터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번 통합진보당의 문제는 당내 비례대표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리투표, 비당원의 투표 등 부정투표의심이 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통합진보당의 당내 후보투표가 부정투표라 썩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단 한 명의 대리투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부정투표인 것은 맞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했던 정의와 진실을 그들 스스로 어겼기 때문에 그들은 썩었고 부패하였다는 국민의 비난 앞에 그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 그들이 할 일이라고는 그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당내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중지를 모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번 눈을 돌려 민주통합당이나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당내후보선발과정을 보자. 그들은 통합진보당처럼 당내투표를 거치지 않았고, 당원도 아닌 외부인사들과 두세 명 정도의 당내인사들로 구성된 공천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수십 명의 국회의원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부정투표를 하였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당원이 아닌 외부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심사결과 결정된 비례대표 후보자들이 민주적으로 정당한가 하면 그것은 필자의 법률가적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비례대표 후보라 할지라도 그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이고, 그렇다면 풀뿌리 당원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게 정당이고, 정당에서 공천한 국회의원 후보자들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나 통합민주당의 비례대표 후보선출에는 통합진보당 같은 치열한 내부당원들의 의견반영절차가 완전 생략된 채 결정권을 행사하는 몇몇 실세들의 의중대로 후보자들이 결정되었다. 그 과정에 약간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 당내 실세들의 결정은 그대로 정당의 결정이 되었고, 그들은 모두 금배지를 달았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당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일부 부정투표가 있었던 통합진보당의 선출절차가 더 썩었는가, 아니면 당원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당내 실세 몇 사람의 낙점에 의해 밀실에서 이루어지다시피 한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의 선출절차가 더 썩었는가? 나는 선뜻 전자가 더 썩었다는 평가를 내리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당원들의 전체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애쓰다 일부 부정투표가 있었던 쪽이 오히려 민주적 절차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는 평가를 내리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물론 그 과정에서 부정투표가 있었던 것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잘못된 일이다). 그렇지만 원초적으로 당원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전체 의사를 묻는 과정 자체를 무시하고 생략해 버린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의 선출과정이야말로 제대로 된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았기에, 저 나희덕 시인이 갈파하고 있는 것처럼 “부패하지 않았기에 정말로 부패한 것”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라며,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신도 나희덕 시인이 되어 이 사태를 다시 한 번 직시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