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안경을 아무나 끼지 못했다

2008-02-12     법률저널
 

얼레빗으로 빚는 하루 

 “명나라 장영이 지은《방주잡지(方洲雜志)》에는 '크기가 돈짝만 한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흡사 돌비늘[雲母]과 같고 금으로 테를 둘렀으며 자루가 달렸다. 오므리면 하나가 되고 펴면 둘이 되었는데, 노인이 두 눈에 걸면 글자가 배나 크게 보인다.' 하였습니다.”

 위는 조선 후기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 제19권》에 나오는 글인데 안경은 중국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눈에 구름 같은 것이 끼어 희미한 것을 밝게 보여준다고 뜻으로 한자 ‘애'’와 ‘체’를 붙여 애체(靉靆)' 라 불렀고, 왜납, 애희(愛希)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눈거울’이라는 뜻의 '안경'으로 굳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안경을 조선시대엔 귀한 사람만 쓰는 것으로 생각해 아무나 낄 수 없기에 정조임금도 안경 끼기를 고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