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진정으로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김정란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아주 오랫동안 인류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했다. …자유는 유보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타자를 찢고 죽였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보내면서 두 사람씩 짝지어주었던 정신, 타자를 네 얼굴로 삼으라고, 뿐더러 가장 가난한 타자를 하느님으로 여기라고 가르친 사람의 아들의 사랑하는 혼, 사람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던 여자들과 세리들에게도 담을 쌓지 않았으며, 배반자 유다의 몫마저 빼앗지 않았던 철저한 자유주의자의 유연한 정신은 다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안에 갇혔다.”(김정란, 영혼의 역사, 새움, 2001년, 35∼38쪽)
게리 윌스는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권혁 옮김, 돋을새김, 2007년, 223쪽)에서 “그는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려 했으며, 그 자신이 그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도발적이고, 보다 더 난폭했으며 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15쪽)이라고 하면서 “복음서들을 경건하게 읽는다는 것은 비록 그러한 모든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진정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던가를 지속적으로 묻는 것”(30쪽)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세상에 부정한 자는 없다며, 게리 윌스는 예수가 오늘날에 오신다면 “동성애자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닌 동성애자들과 함께했을 것”(77쪽)이라고 단언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당대의 권력자나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오히려 멸시받던 여자들, 매매춘하던 여자, 세리 등을 예수 자신의 곁에 두었다. 버림받고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신앙의 중요한 실천 영역이다. 그러나 “예수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칭 그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부정한 영역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84∼85쪽)이다.
오히려 예수는 권력 특히 정신적 권력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예수는 짧은 공생애 기간 “당대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보여준 오만함을 공박했다. 이러한 것을 유대 종교에 대한 특별한 공격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훗날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게 될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했다.”(93쪽), “예수의 행적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며, 공분을 일으켰으며, 가장 위태로웠던 것은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종교를 거부한 것”(111쪽)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가 거부했던 종교는 “자화자찬하기를 즐겼던 바리새파처럼 자신들의 미덕을 거들먹거리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며, 고통스러운 짐을 나누거나 덜어주려 하기보다, 쉽게 더욱더 많은 짐을 지우려는 독선적인 모든 종교들이었다. 자신들의 지도자들만을 찬양하고, 그들을 치장하는 것을 자랑하며 그를 위해 값비싼 기념물을 세우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부자들을 이롭게 하는 종교, 버림받은 자들을 경멸하고 속세의 지배자들에게 아첨하는 모든 종교들이었다.”(134~135쪽)
불행히도 예수가 거부한 종교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약한 자, 자신과 다른 자를 비난하고 억압하며 심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를 과학과 대립시켜 초라하게 만들며, 예수가 함께 하려고 하였던 소외된 사람들을 핍박하는 데에 성경 구절을 멋대로 인용한다.
차기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인 안창호 씨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행하는 기이한 ‘신앙고백’을 보면서 외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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