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최근에 자투리 시간이 남을 때 읽고 있는 무협 웹소설이 있다. 정통 무협은 아니고 40대의 의사가 해외 의료 봉사를 갔다가 반군의 총 앞에서 어린아이를 감싸고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예전에 자신이 읽었던 무협 소설의 세계에 들어가게 됐다는 설정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역사를 일부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기와 무공, 주술과 인신공양, 영물과 요괴가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그런 낯선 세계에서 10살 남짓한 어린아이의 몸으로 살아가게 된 의사는 자신이 갖고 있는 현대의 기술과 지식, 원작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정보를 활용해 자신만의 ‘활인’을 펼친다.
그 활인이라는 게 무협 세계의 시대상에 비추어보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이 많아 주인공은 ‘기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그가 펼친 수많은 활약 중에서 가장 소소한 축에 드는 것이 바로 무협판 부루마블을 만든 것이다.
무협 세계의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의각에서 근무하게 된 주인공. 환자들 중 상당수는 당연히 강호인들이다. 은원에 엮여서 장풍 좀 쏘고 칼도 좀 휘두르고 독도 좀 뿌리다 보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금만 나아지는 것 같아도 다시 칼을 들고 뛰쳐나가려고 하니 의원으로서는 그 혈기 넘치는 환자들을 병실에 잡아둘 미끼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무협판 부루마블.
현대판 부루마블의 무인도는 뇌옥이나 폐관 수련으로 바꾸고 황금열쇠 대신 ‘기연패’를 만들어 단번에 판세를 뒤집을 수 있도록 했다. 효과는 탁월했다. 환자들을 병실에 묶어두려는 당초의 목적을 넘어 제국 전체를 상대로 큰돈도 벌어 어린아이들을 위한 후원 사업도 벌였다.
무협 소설을 보면 ‘기연’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적들에게 쫓겨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는데 마침 바닥이 깊은 호수라 목숨을 구하고 덤으로 전설로만 전해지는 귀한 영약을 얻거나, 목숨에 경각에 달해 숨어들어 간 동굴에서 옛 고수가 남긴 엄청난 위력의 무공 비급을 차지하게 된다거나. 때로는 우연히 지나가던 신선 같은 이들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런 기연을 만나면서 별 볼 일 없던 주인공은 절대 고수로 거듭나게 되고 마침내 강호를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되는 식이다. 무협별에 떨어진 의사도 건국 신화 속에 나오는 영물을 만나 절체절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얻어 요긴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
‘기연’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을 한 방에 역전시킬 수 있는 기적이다. 무협 세계에서만 그런 기연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을 바꿔줄 특별한 인연이나 기적을 꿈꾸게 된다. 나의 잠재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 좋은 조건으로 취업이 된다거나, 안면도 없는 먼 친척이 갑자기 유산을 물려준다거나,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하지만 ‘기연’은 누구나 흔히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이한 인연이라고 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기연이 아니라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 스스로의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나의 노력에 대한, 그 노력으로 쌓은 역량이나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
얼마 전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를 잃은 오탈자들을 경찰에서 특별채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논란을 빚었다. 그런데 정작 수혜자가 될 오탈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연’이 아니라 ‘기회’였으므로.
현행 로스쿨은 누군가에게는 사법시험보다 수월하게 법조인이 될 수 있는 넓은 문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두드려 볼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굳게 닫힌 문이다. 한때 그 문턱에 발을 디뎠으나 지금은 쫓겨난 이들에게도, 처음부터 문밖에 남겨진 이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스스로 역량을 증명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연 아닌 기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