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20-구어체 문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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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20-구어체 문장을 위하여
  • 손호영
  • 승인 2023.05.1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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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말하듯이 쓰라.’는 경구는 판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문어체가 가진 장점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어체는 진중하고 깊이 있어 울림이 큽니다. 소설가 김훈은 문장을 고의로 문어체로 구워냅니다. 김훈은 부친이 세상을 떠날 때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땅을 파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런 울음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들을 꾸짖어 단속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광야를 달리는 말’ 부분 참조)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김훈이 정말 그와 같은 언어로 말을 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시끄럽다. 울지 마라.”는 말이 가지는 평범성을 극복하고자 그와 같이 모습을 바꾸어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어체는 낯섦을 내세우며, 글만이 가지는 매력을 한껏 고양시킵니다.

하지만 판결은 소설이 아닙니다. 공문서는 멋 부림보다 정갈하고 순수함을 우선해야 합니다.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라고 편지 쓰듯 빙빙 둘러댈 필요 없이, “사랑한다.”고 직진하듯 적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구어체로 쉽고 부드럽게 적는 구체적 방법을 조금 살펴봅니다.

첫째, ~되다 식의 수동표현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판결 중 “추완항소는 피고가 이 사건 제1심판결정본을 영수한 날로부터 2주일 내에 제기되어 적법하다고 보여진다.”, “어떠한 생전 증여가 특별수익에 해당하는지는...생전 증여가 장차 상속인으로 될 사람에게 돌아갈 상속재산 가운데 그의 몫 일부를 미리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따라 판단된다.”와 같은 표현에서 ‘보여진다’는 ‘보인다’로, ‘판단된다’는 ‘판단한다’로 고치면 더 부드러울 듯 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판사들도 잘 압니다. 언젠가 기억이 새록거립니다. 판사들 사이에서 수동표현을 경계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수동표현을 쓰는 이유를 나지막이 이야기했습니다. “수동표현은 주어를 당장 특정하지 않은 채 상태를 표현할 수 있어, 편리하다.” 예컨대, 사무실에서 쓰던 물건이 창고에서 발견된 경우, 능동표현으로는 “OO이 물건을 사무실에서 창고로 옮겼다.”고 해야 합니다. 만약 OO이 했는지 △△가 했는지 다툼이 있거나 누가 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다면, 그 행위를 ‘누가 했는지’ 미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럴 때 판사는 “물건이 사무실에서 창고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표현을 쓴다는 뜻입니다(같은 맥락에서 위 ‘보여진다’나 ‘판단된다’도 주어인 ‘법원’을 생략함에 따른 표현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가피한 경우 이외 수동표현 남발은 경계함이 마땅하기는 합니다.

둘째, ‘~에 대해서’, ‘~에 관해서’, ‘~에 있어서’, ‘~에 의하여’ 등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판결 중 “피고인은 자신이 불복하려고 했던 제1심 판결에 대한 항소심 판결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경우 적법한 상고를 제기할 수 없다.”에서는 ‘~에 대한’을 한 문장에서 두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고쳐 쓴다면, “제1심 판결을 불복하고자 했던 피고인은 항소심 판결도 대부분 적법하게 상고할 수 없다.”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장수리공으로 알려진 출판계 외주 교정자 김정선은 글 중에서 ‘~에 대한’을 흔히 볼 수 있다면서 이것은 “지적으로 게으르다.”고 일갈합니다. 그는 ‘사랑에 대한 배신’을 예시로 들며, ‘사랑을 저버리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 사랑에 등 돌리는 짓’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다면서 ‘사랑에 대한 배신’이란 구절은 ‘대한’에 기댔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사실 지금도 판결에서 자주 발견되고 많이들 사용합니다. 지적 게으름이라기보다 ‘마감기한이 정해진 글쓰기에 불가피한 업무 효율을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자기변호를 조막만 하게나마 해봅니다.

셋째, 조사 ‘의’의 남용을 자제합니다. 사법연수원 교재에서는 이 부분을 “조사 ‘의’의 남용 피하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의’를 남용하지 말라며 바로 다음에 ‘의’를 사용하는 역설은 ‘의’가 가진 마성(魔性)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아마도 풀어쓴다면, ‘조사 ’의’를 남용하지 않기’ 쯤 되지 않을까요.

문장수리공은 ‘의’에 더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을 조심하라 했습니다. “-접미사 ‘―적(的)’과 조사 ‘―의’ 의존명사 ‘것’과 접미사 ‘―들’이 습관적으로 쓰일 때가 많으니 주의해서 잡아내야 한다고 (선배들이) 지적하셨지요. 마치 경찰이 단속해야 할 상습범 같더군요.”

일본식 조사 ‘의(の)’가 과용되어 왔다는 지적은 이미 진부할 정도로 아득합니다. 다만 이 부분도 변명은 가능합니다. 판사가 ‘명사’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원고들이 이 사건 소제기 이전에 공제급여의 지급을 청구하였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표현에서 ‘공제급여의 지급을 청구’는 ‘공제급여를 지급하라고 청구“라고 동사 중심으로 고쳐도 되겠지만, 굳이 ‘공제급여’와 ‘지급청구’를 살려 이를 ‘의’로 연결지은 이유는 사건명인 ‘공제급여지급청구’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입니다.

일단 세 가지 정도를 알아보았는데, 새삼 좋은 문장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자 다짐해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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