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재판을 담당하는 동안 여러 건의 학교 폭력 손해배상소송을 만났습니다.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아이들은 물론,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된 아이들까지도 어쨌든 미성년자인 이상,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 받을 권리가 있기에(아동권리협약 제3조 제1항), 회복사법(Restorative Justice)적 접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잘 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피해자 측이나 가해자 측 모두가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풀건 풀고 줄 것 주고’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니즈(needs)가 서로 부합하는 사안은 정말 ‘럭키’한 경우입니다. ‘풀건 풀고’의 뜻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용서받고 또 나름의 사정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하며 마음을 푼다는 의미로 말하더군요. 물론 ‘줄 것 주고’는 정당한 배상액 또는 피해자가 허락한다면 가해자의 경제 사정과 형편을 고려한 합의금을 잘 지급하는 것을 의미하고요.
아니, 그게 왜 ‘럭키’한 거냐? 당연한 거지! 반문의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만, 안타깝게도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의 생각의 차이가 커서 양자의 니즈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많더군요. 대화를 보는 관점의 차이, 피해 회복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 서로에 대한 요구사항의 차이가 큰 경우가 종종 있고, 근본적으로 서로의 잘잘못에 대한 현격한 입장차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당사자들이 말로는 ‘서로 대화로 잘 풀면 좋겠다’고 하지만, 좋은 결실을 맺는 대면 대화로까지 나아가게 하려면, 역량 있는 대화 전문가를 투입하고, 사전 세션과 본 세션 각각은 물론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잘 설계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피해자 측, 가해자 측 각각과의 사전 준비를 잘하는 등 예산, 인력이 투입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힘들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 아프게도 어떤 경우에는 아예 어떤 시도도 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 때가 있으니까요. 가해자가 전혀 자력이 없어서 아무런 배상을 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대화나 사과 기타 그 밖의 피해회복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무조건 거부하거나 묵묵부답 무기력한 경우를 보기도 하고요. 때로는 아예 가해자 쪽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피해자가 있고 피해 실체도 있지만, 가해자로 지목할 사람이 마땅치 않거나 있어도 여하한 이유로 불입건, 수사결과 무혐의나 불기소, 재판결과 무죄 등 공적 절차에서 가해자로 확인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게 된 경우, 때로는 실제 사안의 성격 자체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이럴 때 과연 피해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나의 피해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으니, 내 피해를 없는 것으로 하자! 이렇게 마음만 먹는다면 피해자에게서 실존하는 피해가 곧 사라질까요. 당신의 피해를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 그냥 피해를 잊고 잘 살아가 보세요! 우리가 피해자에게 이렇게 말하면 피해자가 수긍하고 곧 피해를 없앨 수 있을까요.
‘럭키’하지도 ‘다행’이지도 않은 피해자들이 사실 우리 가까이에 많습니다. 그들이 우연히 피해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언제든 그러한 피해자가 될 수 있고요. 재난이나 불운이나 범죄가 나만 피해갈 리가 없는 법이니까요.
‘럭키’한 피해자들을 늘리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회복적 관점과 이해의 공감대를 높여가는 것에 의해 가능하고, ‘다행’인 피해자들을 늘리는 것은 회복적 사법을 제도화하고 사회 내 회복적 대화의 실행 역량을 높이는 것에 의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있을, 회복되지 못하는 피해를 그냥 안고 살아가야 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국가가 공적 피해구조 시스템을 완비·확대하는 것, 그와 같은 피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 내 여건을 조성하며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추진해야 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또는 그 강력한 동력이 되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 사회, 피해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피해자에게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그대로 안고 살아갈 피해자와 함께 그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울타리 말입니다. ‘세상에 대고 외치고 싶어’하는 피해자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며 함께 그 삶을 견뎌 줄 사회적 공감과 치유의 울타리 말이에요.
임수희 부장판사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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