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에세이(49)-‘꿈을 버리면 삶에 무슨 재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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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에세이(49)-‘꿈을 버리면 삶에 무슨 재미가 있는가?’
  • 안혜성 기자
  • 승인 2023.04.14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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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변호사시험법은 로스쿨 수료 후 5년간 5회로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를 제한하고 있으며 이는 로스쿨에 재입학해 수료를 해도 다시 응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절대적 응시 금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위 오탈자들은 10년 여의 시간 동안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고도 법조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이에 사랑샘재단(이사장 오윤덕)은 제도의 사각에 놓인 오탈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200만원의 마중물 지원금이 지급되며 지원금은 여행, 새로운 진로를 위한 공부를 비롯한 다양한 경험과 활동 등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지원 대상자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약속이 되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전을 결심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경험과 사색 등을 담은 에세이 1편을 1개월 내에 사랑샘재단에 제출하면 된다. 에세이의 형식이나 길이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으며 익명으로도 참여가 가능하다.   

지원금 신청 시에는 ①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 참여 동기 또는 계획의 요지를 기재한 신청서 1통(사랑샘재단 홈페이지 소정양식) ② 로스쿨 석사 학위증 등 변호사시험 평생응시금지 해당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 ③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 사본 ④ 온라인 송금 수령 계좌번호 ⑤ 에세이가 익명으로 발표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를 사전에 신청서에 기재해야 한다.   

사랑샘재단의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에 관해 문의사항이나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메일 ydoh-law@hanmail.net, 전화 02-3474-5300으로 연락을 하면 된다. -편집자 주

<꿈을 버리면 삶에 무슨 재미가 있는가?>

강산(필명)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인해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고 성장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짐을 덜어드리고자 가고 싶은 대학교 학과에 합격하였음에도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으로 진학하였습니다. 당시 군대 생활 같은 학교생활이 성격상 많은 스트레스였지만 승선생활관에서의 합숙과 훈련이 기본이 되는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단체생활을 하다 보니 국비로 대학교 생활비 등 대부분을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4년의 군 생활과 같은 대학교 생활을 마치고 한진해운에 입사해 항해사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힘든 선상생활은 버겁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급여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밑천을 늘려 갈 수 있었던 부분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간당직 근무 시마다 망망대해의 선교에서 어린 시절 하다 말았을 법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월급이 모이고 어느 정도 경제적인 부분에서 자신감이 생기자 꿈을 꾸기 시작했고 때마침 로스쿨 개원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것이 싫어 학부 전공 외에 경제 및 경영학 공부를 조금씩 해오던 저는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법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로스쿨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던 주변 친구들 및 선배들은 승선을 조금 더 해서 경력도 쌓고 공부할 자금도 좀 더 만들어 가는 것이 어떠하겠냐며 만류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답답한 선박에서 벗어나 무언가 하고 싶다는 갈망이 더 앞서 27살이라는 나이에 직장을 정리하고 로스쿨 입시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다행히 고생했었던 경력 등이 도움이 됐는지 운 좋게 28살이라는 나이에 입학이 가능하였습니다.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1회 졸업생들이 막 졸업하여 나오던 시절이었고, 대학교 시절을 군대 생활과 같은 훈련 등으로 보냈던 저에게 로스쿨 생활은 동아리 활동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발언의 장과 함께 다양한 기회가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기에 서로 이야기할 것도 많았고 변호사가 된다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즐거운 대화를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대외활동에 열중하다 보니 학업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로스쿨 입학할 당시만 해도 친구가 다니고 있던 의학전문대학원과 같이 운영될 것이라 믿었고 합격통지서를 받자마자 노력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판사나 검사에 뜻이 없었던 제게 필요한 것은 변호사시험 합격증뿐이었고 공부에서 낙오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며 합격률은 급락하기 시작했고 3학년 여름이 지나갈 즈음에는 절반가량의 로스쿨 졸업생은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첫해 1월 시험을 치르고 1년의 3분의 1이 지난 4월 말에야 결과가 발표되었고 시험에 낙방한 것을 알고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이미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3년의 로스쿨 과정을 마치고 졸업 시점에 이미 30대에 접어들었고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제게 막아두었던 곳에 균열이 생기는 것처럼 금전적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무직이라는 신분과 함께 30대라는 무거운 나이로 인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더욱더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같이 시험에 낙방한 동기들이 짐을 싸 신림동에 올라가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공부는 혼자 해야지’라며 지내왔던 그 시절이 제게는 참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결국 금전적인 문제 등이 겹치며 5년 내의 5회라는 기회는 다 써보지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겨둔 채 다시 일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5년이라는 제한이라도 없었더라면 사회생활을 하며 여유가 좀 생겼을 때 다시 도전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라는 생각에 원망도 많았습니다. 6년 만에 다시 나온 사회는 경력단절과 함께 차갑기만 하였습니다. 로스쿨 졸업이라는 꼬리표는 계속해서 따라다녔습니다. 무엇보다 하던 공부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온 저는 실패자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힘든 것과는 별개로 일단 월급을 모아 시험 준비하며 생긴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빚지는 것을 정말 싫어했었고 갚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그 힘든 시절을 참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빚은 다 청산하고 자산도 만들었지만 젊은 시절 10년 이상의 세월을 학교생활과 빚 갚는 시기로 보내다 보니 주변 친구들이 하는 내 집 마련, 결혼, 출산 등이 참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열심히 살다 보니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내를 만나 집도 있고 가정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시험에 낙방하고 오탈자가 되며 가장 값지게 배운 부분이 겸손함이었습니다. 별 쓸모도 없을 것 같았던 로스쿨 졸업장은 다행히 학부 전공을 연관 지어 지방 국립대 박사과정에 지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 평생의 꼬리표, 후회 및 아쉬움은 남아 있겠지만 지금 느껴지는 후회가 후회로 남지 않게끔 더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힘든 분들이 절망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한 걸음이라도 걸어 나중에는 힘찬 발걸음으로 걸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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