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04-전문가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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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04-전문가 사용법
  • 손호영
  • 승인 2023.01.2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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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10년 뒤 세계경제를 가장 잘 예측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직 기재부 장관? 글로벌 기업 CEO, 명문대 학생? 아니면 환경미화원?

초등학교 교사가 우울증을 겪고 있었습니다. 학부모의 폭언 등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우울증으로 진단된 지 3년 정도 지난 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해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제 세상에 남은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평가해야 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공무원 단체보험계약에서는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정신질환 또는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교사의 죽음은 과연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요?

1, 2심은 사망 전날 그가 정상적으로 출퇴근했고, 사망 당일에도 특이한 행동이나 모습이 없었다며 원칙대로 그의 죽음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이니, 보험회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르게 보았습니다(2017다281367 판결). 그리고 그 근거를 전문가에게서 찾습니다. “망인을 치료하였던 정신과 전문의의 전문적이고 의학적인 견해에 관한 증거가 제출되었고, 그 견해에 의할 때 망인은 2006년 학급 내 문제로 우울장애를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겪은 후 매년 10월경을 전후하여 우울삽화가 발생하는 등 망인이 자살할 즈음 계절성 동반의 주요우울장애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원심은 정신과 전문의의 견해 및 그 바탕에 있는 의학적 판단 기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망인이 자살할 무렵 주변 사람들에게 겉으로 보기에 이상한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거나 충동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자살하였다는 등의 사정만을 내세워 망인이 우울증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단정한...잘못이 있다.”

일견 보기에 그는 정상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상한 징후를 보이지 않았고, 죽음의 방식도 충동적이라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울증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겉만 봐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전문가는 잘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도 그랬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는 그가 이미 ‘우울장애 상태’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의견을 존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1984년 10년 후 여러 직업군에게 세계경제를 예측하라는 질문을 했고, 그 질문을 받은 이들은 전직 재무부 장관들, 글로벌 기업 CEO들,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 환경미화원들이었습니다. 10년 뒤 이코노미스트가 묵힌 답변을 꺼내들었더니, 정답에 가장 가까운 1등은 환경미화원 그룹이었습니다. 전직 재무부 장관들은 꼴찌였습니다. 지금도 전문가의 가치를 흔들 때 빈번하게 회자되는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가 겨우 16명을 상대로 물어 표본의 규모가 왜소했고, 경제 예측의 대상을 1994년 12월로 국한시켰던 한계가 있었다는 점은 잘 언급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2011년 (위 질문으로 재미를 본) 이코노미스트가 환경미화원 5명에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물었을 때 결과도 잘 이야기되지 않습니다(당시 4명의 환경미화원이 그의 재선 실패를 예측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류의 질문은 진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가벼운 게임이라고 봄이 타당합니다. 전문가는 “좁고 더 좁은 분야에 대해, 많이 더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깊게 파고든 분야가 있다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전문가를 믿으라(Experto crede).’는 오래된 격언은 여전히 통용된다고 볼 것입니다.

물론 언제나 전문가의 말을 신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피스텔 집주인과 세입자가 보증금 반환 문제로 언쟁을 벌였습니다. 세입자가 앞을 막자, 집주인이 비키라며 그의 웃옷을 잡아당겨 넘어뜨렸습니다. 세입자는 병원에서 2주 치료가 필요한 요추부 염좌상(쉽게 말해 허리부상이다)을 당했다는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았습니다. 집주인은 세입자를 ‘상해’하였다고 할까요?

한바탕 물리적 다툼이 있은 뒤, 흔히들 ‘상해진단서를 끊겠다.’는 말을 합니다. 홧김에 뱉는 말이기도 하면서, 단골 동네 병원 의사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그깟 진단서 하나 못 끊겠는가 하는 뱃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판사는 “상해진단서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사정이 있는 때에는 그 증명력을 판단하는 데 매우 신중하여야 한다.”며, 상해진단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세입자가 실랑이가 있은 뒤 7개월 정도 지나서야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았고,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가 “밀쳐서 다쳤고, 허리 통증이 있다.”는 세입자의 말을 듣고 그와 같이 진단하였다고 말하는 한편, 그는 환자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그와 같은 진단은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고까지 말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입자는 별다른 치료를 받거나 처방받은 약품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판사는 전문가 의견을 논리와 경험법칙에 대비하여 그 타당성을 검증하고자 합니다. 사건의 쟁점에 대해 필요한 경우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다 하더라도 그에 반드시 종속되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명제가 곧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판사는 전문가의 의견도 자신의 합리적인 사고 내에서 그 경중을 판단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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