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와 너, 너와 나: 3편의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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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와 너, 너와 나: 3편의 영화 이야기
  • 최용성
  • 승인 2023.01.0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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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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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면 여러 가지 희망이 절로 부풀어 오른다. 특별히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없더라도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생성, 변화, 소멸하는 만물의 당연한 과정을 인위적으로 구획하여 설정한 관념에 불과하니, 농경 등을 위한 기후 예측용 절기 개념이 아니라면,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과거를 반성하고 다가올 새해를 희망차게 꿈꾸며 서로 온갖 덕담을 주고받는다. 다 부질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근거 없이 품은 희망이라도 거기서 생겨난 힘으로 뭔가를 이루기도 한다. 게다가 대개 절망이나 비관보다는 희망과 낙관이 험한 세상을 살만하게 만든다. 따라서 후회를 어제 몫으로 돌리고 내일은 희망을 노래하면서 살려는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를 살만하게 하는 희망도 혼자의 것일 때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와 너, 너와 내가 함께 희망하고, 그 희망이 더 큰 우리의 몫이 될 때 세상은 더 살만한 곳으로 바뀌어 간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나와 너, 너와 나는 서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거기서 나의 희망을 어떻게 우리의 희망으로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작년에 개봉된 영화 세 편을 통하여 이러한 생각을 더 진전시켜보자.

-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마크 구스타프슨과 함께 연출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 열심히 다니라는 국민교육 시대를 표방한 원작과는 달리, 개인이 타자에게 다가가는 태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아들을 잃은 목수 제페토는 피노키오에게서 아들을, 여린 감성을 가진 아들을 남자답게 키우겠다며 억압하는 파시스트 시장 포데스타는 죽지 않는 병사를, 서커스 단장 볼페 백작은 돈 벌어들이는 스타를 저마다 강요한다. 그들에게 피노키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면 그들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는 피노키오는 그들 각자의 욕망에 응하여 타자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헌신하며 고군분투한다. 위험에 빠진 제페토를 구하려는 피노키오의 헌신은 마치 제페토가 만든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모습과 연결되며 정점에 이른다. 결국 피노키오는 자신은 피노키오일 뿐임을 깨닫고 진정한 헌신을 구현해낸다. 제페토가 피노키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순간 진짜 관계는 이루어지고 구원은 이루어진다. 기예르모 델 토로다운 기괴하고 환상적인 영상 말고는 색다른 형태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유사 작품 아닐까 오만하게 예단하며 보던 나는 피노키오의 마지막 헌신을 바라보며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돌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세상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나는 네가 있어, 너는 내가 있어 서로 함께 세상에 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며 사는 존재이다. 세상은 열린 가능성이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이루기를 꿈꾼다. 다니엘 콴과 다니엘 샤이너트가 연출한, 제목부터 이상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망가진 관계가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동시에 그 관계의 회복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음을 난장판 액션과 코미디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실은 그 정신없는 난장판이 영화의 역사이자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지구의 역사의 축약이고 비유임을 알아채는 순간 끝내 가슴 벅차오르는 깊은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다가설 때 나와 너, 너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고 세상을 구원한다.

- 더 원더(The Wonder)

근거가 없더라도, 세상이 부조리하더라도, 심지어 큰 불행이 닥치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신성한 존재를 찾고 믿는 희한한 존재가 인간이다. 세바스티안 렐리오의 영화 <더 원더>는 기적을 믿고 싶거나 의심하는 19세기 영국과 아일랜드 사람들의 심리를 소재로 다룬다. 신의 은총을 입어 전혀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소녀가 있다고 하면 당신은 그 기적을 경이롭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사기극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영화는 고전 영화 같은 성실함으로 사람들의 심리와 상처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영화는 종교 이야기처럼 보이다가 결국 희망을 잃고 고립된 사람들이 어떻게 희망을 찾아 진정 경이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세상은 잔인하고 힘든 곳이지만, 그곳을 살만하게 만드는 진정한 희망은 너와 나, 나와 너, 우리 사이에 있고, 그것을 편견 없이 정직하게 마주할 때 마침내 구원의 길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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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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