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99-헤어짐의 올바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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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99-헤어짐의 올바른 방법
  • 손호영
  • 승인 2022.12.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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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만나 사랑하는 데에는 특별한 계기나 원인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결론이기도 하지만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은 논리오류가 아니라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헤어짐은 조금 다릅니다. 사랑이 식은 사람은 아직 남은 사람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마침을 납득시키고 서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함입니다. 중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본 인상 깊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울림이 커 지금까지 기억하는 그 시에서, 화자는 상대에게 헤어지는 이유를 절절히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화자는 상대에게 ‘가난’을 이유로 사랑의 끝맺음을 고했고, 상대는 어쩔 수 없이, 이별하고 싶지 않음에도, 겨우 이를 받아들였을 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그 시에서 화자가 사실 어제 로또에 맞았다면? 그래서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면? 그때 그의 이별 통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기에 조금만 더 설정을 보태봅니다. 만약 상대가 화자의 이별 이야기에, 그간 화자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두 돌려주었던 경우라면(화자는 멋쩍게 이를 받았고요), 화자에게 잘 쓰라며 돈까지 준 상황이었다면(화자는 다시 멋쩍게 이를 받았고요)? 발칙하고 무례한 상상인 줄 압니다만, 시의 뒷부분을 자유롭게 떠올려보고자 하는 시도이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그들의 이별은 과연 유효할까요? 상대는 화자에게 어떤 말을 할까요?

최근 대법원에서 나온 판례의 사실관계도 이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헤어짐의 올바른 방법’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재개발조합과 건축사사무소는 정비계획수립 및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업무에 대해 용역계약을 체결합니다. 사업성 검토를 위한 계획설계, 대안설계, 주민설명회, 사업설명회 등 여러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이때 계약에서는 ‘건축사사무소의 잘못(귀책사유)으로 정상적 계약이행이 불가능한 경우, 조합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고 건축사사무소는 이의제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정합니다.

그런데 건축사사무소가 한 일이 조합의 성에 차지 않았고, 결국 조합의 목적이 제때 달성되지 않습니다. 참다못한 조합은 건축사사무소에게 그의 잘못으로 용역계약을 해제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앞서 계약 조항에 따라 건축사사무소에게 용역대금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건축사사무소는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 돈을 달라고 주장합니다. 이 때 쟁점은 건축사사무소의 ‘잘못(귀책사유)’이 있느냐가 될 것입니다. 앞서 시의 화자가 상대에게 ‘가난’을 이유로 이별을 고했을 때, 그 헤어짐이 유효한지 판단할 때 관건이 과연 화자가 정말 ‘가난’한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법원은 여러 사정을 보아 건축사사무소에게 ‘잘못’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사유가 없어진 만큼, 용역계약도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시의 화자는 사실 돈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가난’을 이유로는 헤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과 대응됩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 이유를 말해줄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진실이어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것인가요? “헤어지고 싶으니 헤어진다.”는 말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니까요. 조합과 건축사사무소도 같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있습니다. 민법 제673조는 ‘수급인이 일을 완성하기 전에는 도급인은 손해를 배상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2심은 이 조항을 근거로 ‘조합이 어쨌든 계약을 해제한다고 했으니 해제된 것이다.’며, 용역계약 해제를 전제로 판단합니다.

대법원(2022다246757)은 다르게 봅니다. “네가 잘못했으니 헤어진다.”와 “어쨌든/아무튼 헤어진다.”는 다른 말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효과가 다른 점을 지적합니다. 전자는 계약에 따라 건축사사무소에게 손해배상의무가 있고, 후자는 법에 따라 조합에게 손해배상의무가 있습니다. 조합이 해제한다고 한 말은 전자의 의미이고 후자의 의미는 아닌데, 건축사사무소의 잘못은 없으니 이 계약은 해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급인이 수급인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도급계약 해제의 의사표시를 하였으나 실제로는 채무불이행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밝혀진 경우, 도급계약의 당사자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고 하여 그러한 사정만으로 위 의사표시에 민법 제673조에 따른 임의해제의 의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대법원은 용역계약 해제를 전제로 판단한 2심을 파기합니다.

2심과 대법원의 시선은 ‘사랑’과 ‘헤어짐’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헤어지고 싶으니 헤어진다.’, ‘헤어지고자 할 때는 그 이유를 명확히 이야기하라.’ 물론 계약을 사랑에, 해제를 헤어짐에 대응하는 것이 무리인 줄은 잘 압니다만, 흥미로울 것 같아 빗대보았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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