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98-한정짓기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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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98-한정짓기의 쓸모
  • 손호영
  • 승인 2022.12.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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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등과 함께 ‘올바름’에 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잡아먹을 듯 격하게 끼어듭니다. 소크라테스가 질문만 하지, 대답은 결코 하지 않는 ‘시치미 떼기’ 술법을 편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잠깐 따라가보겠습니다. 트라시마코스가 말합니다. “올바름이란 ‘강자의 이익’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정권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올바른 것이라 공표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기면 올바르지 못하고 하거나 처벌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묻습니다. “이익이 올바른 것이라...따져봅시다. 선생의 주장은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주장인가요?” 트라시마코스가 긍정하자, 소크라테스가 다시 묻습니다. “통치자는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가요? 아니면 실수하기도 하는 사람인가요?” 트라시마코스는 대답합니다.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어 묻습니다. “그렇다면 강자는 법을 제정할 때 올바르게 제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올바르게 제정한 법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법은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 말대로라면 강자가 제정하는 법은 어떤 것이든 다스림 받는 사람이 이행해야 올바른 것이겠지요?” 트라시마코스가 당연하다며 긍정하자, 소크라테스가 마무리짓습니다. “그렇다면, 강자의 이익이 되는 것뿐 아니라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도 올바른 일이 되지 않는가요? 선생 주장대로라면, 통치자가 실수로 자신들에게 최선이 아님에도 잘못 짚어 만든 법이 있을 텐데도 다스림 받는 사람은 이런 것도 이행해야 올바르다는 것 아닌가요.”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름이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강자가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상황을 제시하였고, 여기에 트라시마코스가 수긍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를 단번에 궁지에 몹니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대로라면 ‘올바름이란 강자의 이익뿐 아니라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이끌어진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즉,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자존심이 상한 트라시마코스는 이후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강자가 아니다.’라는 무리수를 던지게 되고, 논쟁은 끝납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나온 대목인데, 논증의 관점에서 꽤나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무엇보다 왠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트라시마코스의 입을 빌려 스승을 ‘시치미 떼기’ 술법을 펴는 사람이라고 슬몃 디스한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사실 저도 조금 공감하는 편입니다).

만약 트라시마코스가 처음부터 ‘올바름’이란 ‘(언제나) 강자의 이익’이 아니라 ‘(실수를 하지 않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한정지었다면, 논쟁이 이와 같이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논쟁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바로 한정짓기의 중요성입니다.

이미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둔 남편이 다른 여성과 살고자 집을 나왔습니다. 부인이 남편의 이혼 요구를 거부하여 혼인관계가 유지되어 오다, 약 18년이 흐른 뒤에 이혼하게 되었고, 남편은 곧 새로운 혼인신고를 마쳤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사망한 뒤 발생했습니다. 그는 공무원이었는데, 퇴직유족급여가 상당했습니다. 이때 퇴직유족급여를 원래 배우자가 받을지 아니면 새로운 배우자가 받을지가 법원에서 쟁점이 되었습니다. 만약 새로운 배우자와의 혼인신고를 마치기 전에도 사실혼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면, 새로운 배우자가 이를 받아갈 것입니다. 판사는 ‘법률상 혼인을 한 사람의 제3자와의 관계는 사실혼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른 판단을 하면서도, 예외가 있음을 언급합니다(대법원 2022. 3. 31. 선고 2019므10581 판결).

“법률상 혼인을 한 사람이 배우자와 별거하면서 제3자와 혼인의 의사로 실질적인 부부생활을 하더라도, 법률상 배우자와 사실상 이혼상태였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3자와의 관계를 사실상 혼인관계로 인정하여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할 수는 없다...(남편과 부인이) 이혼한다는 화해권고결정이 확정되기 전에 사실상 이혼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부족하므로, 그전까지 (남편과 여성) 사이에 사실상 혼인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없다.”

‘법률상 혼인을 한 사람의 제3자와의 관계는 사실혼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은 ‘언제나’, ‘반드시’, ‘항상’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외를 인정할 만한 상황이 있을 수 있고, 판사는 그 퇴로를 미리 열어둡니다. 결론은 원칙에 따른다 하더라도 예외적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단언하지 않고, 예외적 상황이 있을 수 있다며 개방적 자세를 취하면서도 결론은 유지하는 것. 한정짓기는 쟁점에 대한 결론의 설득력을 높이는 방법이 됩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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