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응답하라, 존재의 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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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응답하라, 존재의 두드림!
  • 최용성
  • 승인 2022.12.0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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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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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정한 존재이다. 성장해가면 타인과 마주할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임판은 『존재의 두드림』(지식공감, 2022)에서 그 세계를 아이들이 뛰어노는 트램펄린에 비유한다. “트램펄린이 발걸음에 흔들리듯 언어공동체적 환경은 소통과 관계에 따라 출렁인다. 이처럼 의미들이 관계와 맥락을 따라 미묘하게 변동하는 환경과 타인들 틈에서, 자아는 정체성과 안전을 확보하고자 쉼 없이 분투한다.”(31쪽). 그곳에서 우리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고단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쾌락이든 성공이든 경험이 가능한 모든 것은 경험한 이후에는 한계로 작용할 뿐이다.…자아와 존재의 한계를 자각한 순간 허무주의의 그림자를 짙게 한다.”(207쪽) 게다가 질병, 빈곤, 자연재해, 사고, 심지어 그런 불행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삶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인 “트램펄린은 흔들린다.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확실성을 향한 욕구를 길어 올린다. 그것이 존재가 두드리는 이유이다. 의미와 관계는 흔들리며, 흔들림이 낳은 자아의 불안과 절대성을 향한 욕구로써 존재의 두드림을 부추긴다.…우리는 존재하자마자 흔들림을 극복하고자 삶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또 삶의 의미를 묻자마자 삶의 목적과 끝을 내다보는 우리는, 존재하자마자 존재의 끝을 두드리는 존재이다”(33∼34쪽).

존재의 두드림에 응답하는 태도는 갈린다. 우선 트램펄린을 초월한 참된 세계를 꿈꾸는 종교가 있다. 그 반대편에 신도 실재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삶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가 있다. 허무주의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끌어내린다. 아니면 니체처럼 신은 죽었으니 스스로 위버멘쉬(초인)가 되어 가치를 창조하라고 설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사실상 가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셈이다. 혼자만의 가치는 가치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실제로는 가치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위버멘쉬의 사상은 니힐리즘의 극복이 아니라 니힐리즘의 극단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214쪽) 그럼 우리는 어디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할까.

임판의 『존재의 두드림』은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심오한 철학적 응답이다. “현대인에게는 진리와 절대성보다는 그 상실이 초래한 허무주의와 삶의 사소함이 더 큰 문제”(13쪽) 라고 진단한 저자는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이고 신적인 본질이 있다면 그 본질적인 면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다”(52쪽) 라고 선언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이나 물 자체는 이성으로 사유할 수 없다고 한 칸트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은 우리의 지식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에서 비롯된다”(105쪽) 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진리나 실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나 존재 이유는 반드시 언어적 사고로 드러나야 한다.”(139쪽) 언어, 사유, 의미를 넘어서는 신비주의 체험도 결국 언어와 사유, 의미의 망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넘어선 실재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언어공동체 안에서는 확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으로 또는 논리적 사유로 끌어내는 다른 세계는 모두 우리의 그림자”(163쪽)이고, “결국, 우리를 넘어선 세계나 우리 이전의 세계는 없다. 그렇게 가정된 세계 역시 우리가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모두 이 세계 내의 문제이다.…우리 사고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나 세계는 우리가 부여한 모든 의미를 제거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무의미에 불과하다.”(164쪽) 그 결과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막다름이며, 주어진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서 일종의 감옥”(192쪽)에 존재는 갇힌다.

그럼 다시 허무주의인가? 임판은, 허무주의는 공동체와 역사가 만들어낸 의미에 불과함에도 이를 숨긴 채 마치 절대성의 영역에서 온 진리처럼 위장하여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지적한다. 진리나 참된 세계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삶의 근본적 의미나 심오함의 가치에 이르는 길로써 “시선을 의미 너머 바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해야”(193쪽) 하고, “실재나 진리가 우리의 경험과 사고의 투영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 투영을 통한 무한의 추구가 우리의 본질임을 인정”(232쪽)하면서, “심오함과 충일감의 원천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접근하는 자아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념이 아니라 진리와 절대성을 향하여 온몸을 던져 추구했던 헌신의 공통성이 심오함을 향한 열쇠”(257쪽)임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존재의 두드림은 관조를 통한 헌신 즉 명상과 만나 삶의 심오함을 성취한다. 물론 우리는 안다. “어떤 의미를 세워도 의미는 시간 앞에 허물어질 것”임을,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의미를 누리는 존재이며 끝없이 의미를 쌓아 올리는 존재이다.…허무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더불어 허무를 넘어설, 의미를 넘어설 심오함과 신비스러운 실재도 바로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존재를 두드리는 존재이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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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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