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94-암기의 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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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94-암기의 효용
  • 손호영
  • 승인 2022.11.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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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지난 10. 21. 아시아법경제학회(Asian Law and Economics Association, AsLEA)에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발표할 기회를 갖는 것은 흔치 않다. 한번 준비해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하셔서,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던 ‘비용편익분석에 대한 사법심사 기준 및 방법에 관한 연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함께 논의하고자 했습니다. 한동안 천착했던 주제이고 여전히 관심 있는 분야이며, 박사논문을 작성하면서 입력과 출력을 거쳤던 것이라, 내용 준비 자체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영어 발표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영어. 읽는 것이야 어느 정도 한다 하더라도 말하기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국어로도 어려운데 하물며 영어라니. 하지만 영어 발표 기회를 지나치지 않은 데는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내가 이야기를 한다는 조건 하에서라면, 그것은 영어든 한국어든 중국어든 스페인어든, 가능은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외우면 되죠.

외국어고등학교를 다닐 때, 영어회화 수업이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즐비한데, 영어회화 성적은 제가 무척 좋은 축에 속했습니다. 시험은 영어연극과 면접이었습니다. 영어연극이야 적절한 대사 암기와 연기력(!)으로 커버했고, 제게 진짜 시험은 면접이었습니다. 겁이 나긴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리 어렵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무엇이 질문으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에게 물어보는 것이 뭐 그리 다양할까요. 토플 지문 등에서 30개 정도 예문을 뽑아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질문을 받아도 제가 준비한 예문에 어떻게든, 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게 연결시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질문과 저의 대답은 대강 이랬습니다. “친구와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지구, 달, 태양의 거리나 위치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발생하는 것처럼(밀물/썰물 예문), 친구와의 사이도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순리대로 하고자 한다.”

이번 AsLEA를 대비해서는 대본을 일단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부터 영어작문을 하면 수준도 높지 않을 것이고, 비문도 많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성실히 달았던 각주의 참고문헌을 참조해, 제가 표현하고자 한 내용을 영어문장으로 일단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어나 문장구조를 조금 바꾸는 작업(리프레이즈, rephrase)을 해서 대본을 완성했습니다.

그 다음은 외우기입니다. 외우는 데는 소리 내서 말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주변에 많은 스터디카페 세미나실을 빌려 출근 전이나 점심시간에 혼자 영어로 떠들면서 외웠네요. 덕분에 발표당일, 오랜만의 영어 사용이었는데 저의 영어 실력에 비해서는 나름 부드럽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물론 복병 같은 질문/답변 시간에서는 제가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네요.).

발표를 끝내고 나니 지도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글로 썼다 하더라도 말로 압축해서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내용이 머릿속에 명확히 정리되어 있어야 하는데, 출력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외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내용을 외우고 나면, 그 내용을 더 이해하게 되는 묘한 마법이 있습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나 연수원 시험을 준비할 때도 많이 사용했던 방식이고, 지금도 새로운 내용을 접할 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외운 내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듯 말해보기.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이야기해도 좋고, 스스로 정리한 체계를 따라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일단 머릿속에 각인해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습니다.

외우기를 잘하는 방식이야 다들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 방법을 썼습니다. 하지만 결국 외우는 것의 왕도는 ‘반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쿄대 법학과 수석 졸업으로, 현재 변호사로 일하는 야마구치 마유(山口眞由)는 ‘7번 읽기 공부법’을 설파했습니다. ‘① 우선 전체를 훑어본다. → ② 확인하면서 단어를 골라낸다. → ③ 눈에 띄는 것을 가볍게 습득한다. → ④ 의미를 파악하며 읽는다. → ⑤ 이해도를 20퍼센트에서 80퍼센트로. → ⑥ 요령을 정리하여 머릿속에 입력한다. → ⑦ 세세한 부분이 재현될 때까지 완벽을 기한다.’ 그의 공부법은 다른 무엇보다 ‘반복’에 집중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반복하다보면, 외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질 것입니다.

외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물론 많습니다만, 외우는 것의 효용도 제법 크다는 것을 새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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