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살아남으라, 누구든 살아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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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살아남으라, 누구든 살아남으라
  • 최용성
  • 승인 2022.11.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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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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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믿을 수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고는 한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꽃다운 젊은이들, 우리 사회의 소중한 시민들이 안타깝게 생명을 잃었다. 슬프고 슬픈 일이다. 충격적이고 비통한 일이다. 희생자들은 내 자식, 내 형제자매, 내 친구, 내 제자, 내 스승, 내 지인, 나 자신이다. 누구든 그 시간, 그 자리에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고통을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희생자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말들이 떠돈다. 이들 비난과 조롱은 혐오에 찌든 짐승의 것이다. 이것을 논쟁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마치 의미 있는 발언처럼 취급하여서는 안 된다. 각자 생각은 다 다를 수 있지만,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슬픔을 조롱하는 사악한 생각까지 존중할 이유는 없다. 말하고 쓸 수 있다고 다 사람다운 말과 글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민이 생명을 잃는 현장에 정부는 없었다. 보호해야 할 젊은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판단하고 대통령의 예고에 따라 검찰이 주도한 마약 범죄 단속을 위한 목적에 경찰 자원을 집중하면서 정작 시민들을 보호할 경찰 작용은 증발하고 말았다. 마약사범을 잡는 일과 시민 한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일 중 무엇이 더 중한 일인가. 압사 위험을 경고하는 11차례의 절박한 신고를 가벼이 여긴 경찰의 문제는 따져 묻고 앞으로 개선할 일이겠지만, 결국 경찰을 그런 식으로 운용한 것은 정부의 잘못이다. 경찰력의 조직과 시간적·공간적·기능적 배분, 활용이 정부와 무관하고 경찰의 잘못일 뿐이라고 강변한다면, 그것은 정부를 이끌 자격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지방정부의 잘못도 크다. 엄청난 인원이 몰릴 것을 예상하고 그 장소의 지형적 여건을 숙지하고 있을 서울특별시나 용산구가 질서 유지를 위하여 아무런 준비도,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잘못은 사건 발생 후 희생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유족들은 참담한 심경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시신을 찾아 헤매야 했다. 코로나 방역을 거치면서 프라이버시 침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촘촘하게 짜인 정보력과 행정력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의 행정 인프라는 갑자기 어디론가 증발하고 말았다.

다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주최자가 없었다느니(그럼 더더욱 정부와 지자체 책임이다), 경찰이 통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느니(사실이 아니다!), 경찰이나 소방력을 미리 배치하였어도 같았을 거라느니(역시 사실이 아니다!) 따위의 면피용 말들이 책임을 통감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입에서 거리낌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법과 원칙’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들며 행정을 이끈 여파에 물든 탓일까. 애당초 자신들이 그 자리에 가 있는 이유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고 지키는 데에 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무한 책임을 지는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유족과 국민에게 “죄송합니다”라고 한마디 말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행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기이한 궤변들을 뿜어내고 대통령은 이를 지켜보는 사이에 행정기관이 아닌 대법원장이 “참담하고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한 것이 신선해 보일 정도였다. 국민이 분노하자 뒤늦게 사과가 따랐지만, 대통령의 사과는 여전히 없다.

또다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참사라는 말 대신 ‘사건’이, 희생자나 피해자 대신 ‘사망자’라는 무미건조한 단어들을 사용하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강제되었다. 공적 문건 표기는 중립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따랐다. 비통한 참사를 보고도 측은지심이 담긴 말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는 맹자식으로 표현하면 인(仁)을 잃은 행위이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합동분향소에 위패나, 사진도 두지 못하도록 하고, 그곳에서까지 ‘사건’이나 ‘사망자’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태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일은 또 있다. 왜 공무원들에게 근조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검은 리본을 달 것을 요구하였을까. 이게 애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들일까. 왜 이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참으로, 참으로 궁금하다.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 노력해도 못 막는 일은 있다. 그런데 사고 발생 후 정부의 태도가 이런 식이어서는 정말 곤란하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의 통치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 가까운 곳에서 믿기 어려운 비극들이 계속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온다. 정부는 보이지 않고, 국민이 각자 도생하라는 시대에 나는 기형도의 시어를 바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살아남으라, 누구든 살아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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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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