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불멸: 릴리 불랑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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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불멸: 릴리 불랑제 이야기
  • 최용성
  • 승인 2022.09.0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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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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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기품을 지닌 그녀는 도도하고 당당하다. 잔인한 운명과 마주하여도 전혀 굴복하지 않을 기세이다. 그렇지만 눈빛은 한없이 순결하고 호기심이 넘친다. 흑백 사진 속의 그녀에게서는 세상을 초월한 것 같은 아름다움, 긍지 그리고 끝없는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 고고한 처녀의 모습 속에서 시간은 영원히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아론 코플랜드, 레너드 번스타인, 아스토르 피아졸라, 월터 피스톤 등등을 가르쳐 20세기 위대한 작곡가들의 대모라고도 불리는 나디아 불랑제(1887∼1979)에게는 경이로운 동생이 있었다. 릴리 불랑제(Lili Boulanger, 1893∼1918)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 작곡가의 자질을 보였다. 나디아의 정신세계에 릴리가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뒷날 노년의 나디아 불랑제가 크리스토퍼 파머에게 “릴리는 1918년에 죽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이끌며 돕고 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스물이 채 안 된 나이에 릴리는 로마 작곡 대상을 수상하여 많은 사람의 기대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병약했던 릴리의 짧은 삶은 투병생활로 이어졌고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재능을 받았으니 이런 운명이 공정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인생의 덧없음, 자신의 존재가 소멸해감을 느끼며 작곡하던 릴리의 절박한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젊은 날 작곡한 음악임에도 그녀의 작품세계는 심오하다. 거대하고 숭고한 정신성을 담은 종교음악에서부터 섬세하고 신비로운 가곡까지, 작품 수는 적고 성악곡의 비중이 크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음악세계는 다양하고 원숙하다.

릴리의 종교음악에서는 프랑스적이라기보다는 유대적인 색채가 느껴진다. 미클로시 로자의 위대한 종교서사극 음악을 예감시키는 대목도 보인다. 시편을 텍스트로 삼은 음악에서 처음 시작되는 저음의 울림은 가늠할 수 없는, 끝없는 심연에서 올라와 듣는 이를 일상과 다른 세상으로 초대한다. 서서히 합창이 떠오르는 그 장엄하고 비극적인 세계를 듣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릴리 불랑제의 다 피지 못한 삶이 자꾸 떠오른다. ‘피에 예수’(Pie Jesu)를 보이 소프라노가 깨질 듯 약한 발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저려온다. 어쩌면 음악에 대한 직접 반응이 아니라 작곡가의 짧은 생애를 기억하며 느끼는 나만의 감상법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역시 음악을 통하여 오는 것이니 결국은 음악의 힘이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음악사에서도 여자들은 남자들의 장식처럼 취급되었다. 특히 작곡가들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하였다. 릴리 불랑제 이전에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클라라 슈만, 파니 멘델스존, 세실 샤미나드, 에이미 비치 등등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을 힘들게 뚫고 여성의 음악사를 만들어낸 선구적 작곡가들이지만, 음악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음악을 비롯하여 예술은 정치와 경제, 법과 인권 등등의 사회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양성평등이 실현되면서 세계적인 여성작곡가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대에 세상을 떠난 ‘소녀 릴리’의 음악이라고 가볍거나 감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릴리 불랑제의 장엄하고 비통한 종교음악의 세계는 음악사의 다른 걸작들처럼 충분히 감동적이며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가곡들은 얼마나 섬세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가. 물리적으로는 짧지만 실은 영원을 살아낸 작곡가의 음악이 여기에 있다.

모든 소멸하는 존재는 덧없지만 그로 말미암아 아름답다. 불멸은 바로 그 안에 있는 것 아닐까? 한껏 욕망을 실현하려고 몸부림치다가 어느 순간 욕망을 넘어 진리에, 선함에, 아름다움에 이르지만 결국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 바로 그렇기에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불멸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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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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